'도시 속의 사막'엔 욕망의 비움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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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8면

아 침 나절의 강변엔 짙은 안개가 흐르고 있었다. 거대한 잿빛 짐승처럼 드러누워 있는 도시 위로도 깊고 긴 한숨 같은 안개가 온통 뒤덮여 있었다. 라디오 뉴스에선 서울의 가시 거리가 3백m라고 전한다. 나의 가시 거리는 어느 정도였을까. 한치 앞도 내다 볼 줄 모르고 아끼는 사람의 속마음조차 헤아릴 줄 모르는 그런 근시안이 아니었던가.

나는 남루한 의복을 걸친 채 첫 번 째 수도원 방문에 발을 내디뎠다. 나의 남루한 의복이란 다름 아니라 아직도 벗어 던지지 못하고 있는 격정과 욕망, 아집으로 굳어진 이기심이나 우수 같은 것들을 씨실과 날실로 해 짜여진 그런 후줄근한 옷이다.

그리 어렵지 않게 찾아간, 수유리에 위치한 까르멜 여자 수도원의 정문은 열려 있었고 뜰엔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다. 정면으론 붉은 벽돌의 성당이 보이고 그 옆으로 몇 채의 단층 건물이 둘러 서 있었으며, 아직 잎이 돋아나지 않은 겨울 나무들이 수도원의 깊은 침묵에 동참하고 있었다.

중세 이후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에 의해 개혁된 까르멜 수도회가 우리 나라에 창립된 것은 1940년 프랑스로부터 다섯 분의 까르멜 수녀님을 맞아들이면서였다.

아무런 장식도 없는 작은 객실 나무 의자에 앉아 나는 원장 수녀님을 기다렸다. 개혁 까르멜의 창립자인 데레사 성녀의 초상화와 그 아래 놓인 난 화분 하나, 그리고 오래된 듯 한 책상 하나와 나무 의자 몇 개가 방에 놓인 것의 전부였다. 내가 앉아 있는 의자는 격자가 쳐진 창 앞에 놓여 있었다. 창 뒤론 또 하나의 방이 있었고 잠시 후 격자 뒤의 미닫이문이 열리며 갈색 수도복의 원장 수녀님이 조용한 미소로 나를 맞아 주셨다.

그리고 수녀님과 나는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잠시 대화를 나누었다. 갈색 수도복에 가로·세로 무늬를 긋는 흰 격자를 사이에 둔 채로…. 그러나 그 격자가 내겐 결코 차가운 단절의 의미로 다가오지 않았다. 상대방을 더 잘 볼 수 있기 위해, 그리고 영적인 만남을 위해 꼭 두어야만 할 적당한 거리, 아름다운 장치로 느껴졌다. 그리고 그들은 이 세상과의 사이에 두어야 할 적당한 거리를 위해 스스로를 그렇게 격자 안에 가두는 것이었다. 강요된 고독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선택한 고독 속으로….

까 르멜의 하루 일과는 5시30분의 기상 첫 신호에 지체 없이 일어나는 아주 작은 자아 포기로부터 시작된다. 이렇게 시작된 하루의 모든 일과는 관상과 기도를 향해 짜여진다. 점심 식사 후의 한 시간 정도의 담소 이외에는 모든 시간을 침묵 중에 기도하고 일하며 그 기도는 정해진 시간뿐 아니라 생활의 모든 면에 스며들도록 하여 일상의 여러 가지 일조차 이미 노동의 영역을 벗어나 기도의 영역에 들게 하는 것이다. 까르멜의 특징은 기품과 간결함·단순함이다. 성당을 제외한 수도원 내의 모든 곳에 일체 장식을 하지 않음으로써 그 옛날 까르멜 수도자들이 은수자로 살았던 시대의 사막생활을 재현해 시선이 내면으로 향하도록 한다.

까르멜 수도원을 '도시 속의 사막' 이라고 하신 원장 수녀님의 말씀은 내게 큰 울림을 남겨 주었다. 예부터 은수자들은 왜 사막으로 향하곤 했던 것일까. 십자가의 성 요한 성인은 아름다운 Todo(全)를 얻기 위해 온갖 피조물로부터 이탈하는 Nada(無)의 길을 택해야 한다고 하셨는데 모든 것을 포기함으로써 모든 것을 소유하기에 적합한 가장 고독한 지대가 바로 사막이 아니었을까.

까르멜 수도자들은 모두를 사랑하게끔 떠미는 절박한 내적 힘으로 온 세상의 고통과 시련, 괴로움과 희망을 가슴에 품으며 기도와 탄원을 통해 이 세상과 하나가 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탈과 비움, 철저한 봉쇄와 침묵, 이 세상과의 격리를 통해 더욱 내밀하고 영적인 이 세상과의 결속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이 수도원에서 내가 볼 수 있었던 것은 봉쇄구역을 제외한 곳의 뜰과 성당과 몇 몇 건물, 그리고 격자 뒤에서 조용히 빛나던 원장 수녀님의 깊은 눈빛뿐 이었지만 내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크고 깊은 사랑의 물줄기가 젖줄처럼 그 곳 봉쇄 구역으로부터 시작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 소란스런 도시 속으로 나와 끝 모르게 이어지는 자동차들의 행렬에 끼어들었다. 우리 모두는 지금 어느 곳을 향해 이처럼 꼬리를 물고 달리고 있는 것일까, 생각하며…. 스스로 무(無)가 되기 위한 고독하고 아름다운 사막 지대 하나도 가슴 속에 간직하지 못하고, 사랑을 키우기에 적합한, 철저하게 봉쇄되고 격자로 가리워진 비밀스런 골방도 하나 갖지 못한 채 다만 고독과 황량함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줄달음 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돌아오는 길에도 여전히 안개는 걷히지 않은 채 시야를 부옇게 흐려놓고 있었지만 언뜻 언뜻 따뜻한 위로 같은 한낮의 햇살이 안개 사이로 조금씩 스며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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