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종기(1939~ ) '파도' 전문
미련한 파도야
이 해변에 깔린 집채만한 바위들
밤낮 네 가슴으로 치고 울어 보아야
하얀 피의 포말만 흩어질 뿐인데.
한 삼백년은 지나고 나야
네 몸 굴리면서 간지럼 즐길
흰 모래사장이라도 되어 줄 텐데.
그때가 되면 누가 너를 기억하겠니.
허리 구부린 채 혼자서 춤출래?
미련한 파도야, 세월 가는 것도 모르고
목마른 폭풍만 꿈꾸면 어쩔래?
긴 편지를 쓰고 지우고 다시 또 쓰는
멀리서도 쉬지 않는 파도의 손.
수천.수만년간 파도는 바위를 쳐왔지만, 아직도 바위는 해변에 있고 파도는 바위를 때리고 있다. 삶은 꿈쩍도 하지 않는데, 그렇게 오랫동안 마음도 삶에 매달려서 흔들고 치근거리고 있다. 그래서 이 세상과 삶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불가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헤아리고 헤아려도 아무 일 없고, 행하고 행해도 아무 일 없다'.
김기택<시인>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