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詩)가 있는 아침 ] - '파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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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마종기(1939~ ) '파도' 전문

미련한 파도야

이 해변에 깔린 집채만한 바위들

밤낮 네 가슴으로 치고 울어 보아야

하얀 피의 포말만 흩어질 뿐인데.

한 삼백년은 지나고 나야

네 몸 굴리면서 간지럼 즐길

흰 모래사장이라도 되어 줄 텐데.

그때가 되면 누가 너를 기억하겠니.

허리 구부린 채 혼자서 춤출래?

미련한 파도야, 세월 가는 것도 모르고

목마른 폭풍만 꿈꾸면 어쩔래?

긴 편지를 쓰고 지우고 다시 또 쓰는

멀리서도 쉬지 않는 파도의 손.



수천.수만년간 파도는 바위를 쳐왔지만, 아직도 바위는 해변에 있고 파도는 바위를 때리고 있다. 삶은 꿈쩍도 하지 않는데, 그렇게 오랫동안 마음도 삶에 매달려서 흔들고 치근거리고 있다. 그래서 이 세상과 삶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불가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헤아리고 헤아려도 아무 일 없고, 행하고 행해도 아무 일 없다'.

김기택<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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