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 포럼

배반당한 서민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5면

박보균
박보균 기자 중앙일보

지쳤다. 그리고 알았다. 다수 국민은 서민을 위하겠다는 정권일수록 서민을 눈물짓게 한다는 어처구니없는 배반의 논리를 깨달았다. 평등을 외치는 정권일수록 불평등이 커진다는 허망한 역설의 정치를 뼈저리게 맛보고 있다.

노무현 정권은 '서민 우선'을 약속하며 승리를 거머쥐었다. 이회창 후보를 특권과 귀족층의 대변자로 몰아쳐 정권을 잡았다. 그런 다짐은 이제 우울한 추억거리가 되었다. 외환위기 때보다 어려운 경제, 심해진 빈부 격차는 논란의 여지 없는 사실이 돼버렸다.

지금처럼 민생이 뒷전인 시절은 없었다. 노 정권이 권력 축에도 끼워주지 않고 멸시하는 전두환 정권 때도 이렇지 않았다. 그때는 대통령부터 부지런히 생산 현장, 시장 바닥을 돌면서 민생을 독려했다. 그 장면을 놓고 지금 정권의 핵심들은 쿠데타 정권이 부족한 정통성을 보완하려 했던 것이라고 비웃음을 던진다. 그러나 다수의 서민은 그들이 비아냥댈 자격이 있느냐고 거꾸로 묻고 있다. 김영삼.김대중 정권도 개혁을 줄곧 내세웠다. 그들 정권 때만 해도 개혁이 시원치 않거나 시대에 뒤떨어지면 성난 여론에 움찔하면서 경제를 열심히 다지려 했다.

집집마다 '부자(父子) 백수'가 늘어난다. 직장에서 밀려난 아버지에다 취직하지 못해 쩔쩔매는 대학생 아들로 중산층.서민의 가정은 망가지고 있다. 손님 없다는 말은 택시기사의 익숙해진 하소연이 돼버렸고 중소기업, 상인들의 삶은 생존투쟁이란 말이 어울릴 정도로 절박하다.

지금 정권 들어 왜 민생이 유난히 홀대받을까. 현 정권 실세들의 독특한 성향과 별난 열정 때문일까. 한강의 기적, 1만달러 소득을 만드는 데 삽질했던 경험이 적어 먹고사는 문제는 저절로 해결되는 줄 아는 것일까. 일자리가 널렸던 1980년대 호황기에 대학을 다녀 청년실업의 쓰라린 고통을 모르는 것일까. 민족 자주.역사 청산.정의 평화 같은 화려한 깃발을 내걸고 어설픈 명분과 시대착오적 이념의 한풀이에서 성취감을 느끼기 때문일까. 대기업과 가진 자를 윽박지르면 서민의 고통을 풀 수 있다는 분열적 계층의식이 작동하는 것일까.

확실한 것은 국정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있기 때문이다. 내년이면 집권 3년차가 되지만 경제 살리기는 여전히 뒤쪽에 있다. 현 정권의 핵심 관심사는 세상을 뒤집는 거다. 사회 주류의 판을 바꾸는 것이다. 4대 입법은 그 수단과 발판일 것이다. 국가보안법으로 인권탄압을 받고 불편한 사람은 요즘 거의 없고 서민의 삶과도 상관없다. 그런데도 보안법 폐지에만 매달려 있다. 사학법은 해맑아야 할 교육 현장을 거친 이념투쟁의 장으로 변질시킬 것이라는 걱정을 키우고 있다. 과거사법은 건국 이후 역사의 정통적 흐름을 흔들려는 것으로 비춰진다.

현 정권의 이런 의도를 국민 대부분은 꿰뚫고 있다. 장기 집권의 법적.제도적 틀만 짜는 데 골몰하고 있다는 의심마저 널리 퍼지고 있다. 정치.사회 격변에 단련된 서민들인데 현 정권이 아무리 개혁으로 포장해도 속뜻을 숨길 수 있겠는가.

민심의 원성이 높고 정권 지지율이 30% 아래에서 장기간 머물고 있다. 독재정권이라면 반정부 기류가 시위 형태로 꿈틀댈 만한 상황이다. 지금은 민주정부니 그럴 리 없겠고 야당은 믿음직한 대안으로 국민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있다. 그렇지만 서민을 그만 애먹이고 경제를 진심으로 챙겨 달라는 목소리는 거세지고 있다. 노 대통령은 이라크 자이툰 부대에서 "남은 문제는 대통령이 잘해 달라는 것이다. 잘하겠다"고 다짐했다. 다수 국민은 그것을 민생으로 달려가겠다는 다짐으로 믿고 싶어 한다. 노 대통령이 정말 그래줄 것인가.

박보균 정치담당 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