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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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커피 물을 끓이려고 가스레인지 불을 켠다

새벽 세시다

가스레인지의 스위치를 비트는 하얀 손이

낮엔 복숭아나무 죽은 가지 두어 개를 툭툭 분질렀다

아주 가까운 둔덕에서 소쩍새가 운다

그믐밤인가 보다

내가 청혼했던 여자의 잠도 깊겠다

내겐 벌써

저기 아득히 흘러가버린 과거가 있다

당신도 알다시피 매우 숭고한

쓰라린 과거다

-장석주(1955~ )'그믐밤'

새벽 세시에 홀로 소쩍새 울음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떨리는 손으로 죽은 가지 몇 개를 분질러 본 적이 있는가.

어둠 속에 앉아 헤어짐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잠 못 드는 밤, 그 여자 몰랐었기를 바란 적이 있는가.

벌써 흘러가버린 그날에 대해 숭고했다고 말한 적이 있는가. 홀로 차 한잔 끓이려고 불을 켜는 그믐밤.

천양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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