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유치찬란 내숭 떨지 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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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8면

홍감독이 신작 '생활의 발견'을 선보였다.

1996년 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이후 '강원도의 힘''오! 수정'을 2년 주기로 만들었던 그는 이번에도 예의 2년을 엄수했다. 완성된 시나리오 없이 그날 그날 촬영 현장의 분위기를 작품 속에 녹이는 스타일도 여전하다.

외견상 달라졌다면 제목이 고색창연하다는 점. 뭔가 상징적 의미가 가득한 것처럼 보였던 전작들과 달리 전혀 영화 같지 않은 제목을 선택했다. 중국 작가 임어당(語堂)의 에세이집 『생활의 발견』과는 관계가 없다.

특히 홍감독은 이번에도 시시껄렁한 연애담을 앞세우며 사랑이라는 찬란한 이름에 덧씌워진 누추한 현실을 하나 하나 벗겨보인다. 얘기 자체가 전작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 주목할 변화가 있다. 비유컨대 홍감독이 몸과 마음을 크게 낮춘 것처럼 보인다.

비록 블랙 유머이긴 하지만 킥킥 웃음이 터져나오는 코미디를 곳곳에 포진시켰고, 성애 장면에선 남녀의 전신을 과감하게 노출시키는 등 대중성 확보에도 상당 부분 신경을 쓴 것으로 보인다.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에 두 번이나 초청되는 등 한국에선 몇 안되는 작가주의 감독으로 국내외에서 명성을 쌓았으나 관객 동원면에선 전국 15만명('오! 수정')이 최고였던 그의 '이력'을 살펴볼 때 결과가 기대된다.

말하자면 '생활의 발견'은 '생활의 과장'이다. 일상의 부조리를 때론 현미경처럼 미세하게 들여다보고, 때론 확대경처럼 부풀려 보면서 사랑, 혹은 연애의 통속성·우연성·모방성 등을 우스꽝스럽게 비틀어댄다.

영화는 로드 무비 형식을 따른다. 영화 캐스팅에서 탈락한 무명 배우 경수(김상경)가 마음을 달래려고 춘천에 있는 아는 형(김학선)을 만나러 갔다가 그곳에서 우연히 만난 무용수 명숙(예지원)과 짧은 밤을 보낸다.

"자신을 사랑해 달라"고 막무가내로 요구하는 명숙의 황당한 요구를 뿌리친 경수는 경주행 기차에서 마주친 대학교수의 부인 선영(추상미)에게 마음을 뺏긴다.

감독은 이들 세 명이 잡고, 당기고, 도망치는 일주일간의 사랑 놀음에 카메라를 고정시킨다.

'생활의 발견'에서 주목할 부분은 이들이 나누는 대사와 행동이다. 서로 잘 알지 못하면서도 상대의 시선을 잡아두려는 어색한 상황에서 연출되는 쭈뼛쭈뼛한 몸짓과 봉창 두들기는 듯한 썰렁한 유머가 시종일관 이어진다.

감독은 명숙과 선영이 각기 경수에게 남긴 말, 즉 "당신 속의 나, 나 안의 당신"이란 '아름다운' 전언을 중첩시키며 사랑에선 결코 내숭을 떨지 말자고 주장하는 한편 사랑은 얼마나 유치한가를 보여주는 '2중 드리블'를 능숙하게 밀고나간다. 번잡한 시장통, 허름한 술집 등을 전전하는 감독의 발길도 전작들과 다름이 없다.

하지만 '생활의 발견'은 형식적으로 느슨한 편이다. 동일한 시공간에서도 각기 다른 기억과 경험을 나누는 전작들의 정교하게 계산된 짜임새에 비하면 다소 평면적이고 내용 자체도 설명적이다.

때문에 그의 형식 미학에 매료됐던 소수의 팬들에겐 오히려 반갑지 않을 수도 있다. 22일 개봉. 18세 이상 관람가.

박정호 기자

NOTE

올 영화계의 최대 이변은 김기덕 감독의 '나쁜 남자'다. 전국 70만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김감독을 대중 속으로 끌어내렸다. '생활의 발견'에도 그런 '행운'이 올까. 새로운 한국 영화를 보고 싶어하는 관객의 욕망은 부쩍 높아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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