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족 현대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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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호 33면

“이 여자가 아니라면 저는 평생 독신으로 살겠습니다.”
1968년 31세의 노르웨이 왕세자 하랄드는 부왕인 올라프 5세에게 이렇게 말했다. 9년 연애한 동갑내기 소냐가 평민이라는 이유로 부왕이 결혼에 반대하자 배수진을 쳤다. 이에 올라프 5세도 마음을 움직였다. 소냐는 그해 왕세자와 결혼해 평민 출신으론 이 나라의 첫 왕세자빈이 됐으며 91년 첫 왕비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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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부가 낳은 남매는 모두 신분을 초월해 결혼했다. 심지어 아들 하콘 왕세자는 다른 남자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하나 둔 미혼모 메테-마리트와 혼전 동거를 하다 2001년 결혼했다. 혼전 동거 사실이 알려지자 일부에선 품위를 손상한다며 왕실 폐지론까지 들고 나왔다. 그러자 부왕이 진화에 나섰다. 그는 자서전을 펴내면서 “경호 문제로 왕세자와 그 ‘피앙세’에게 혼전 동거를 허락했다”는 내용을 일부러 넣었다. 아들 커플에게 면죄부를 준 것이다.

2000년 12월 1일 왕세자는 약혼을 하면서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배필에게 선물했던 것과 똑같은 반지를 구해 미래 왕세자빈의 손가락에 끼워주었다. 사랑에는 어떠한 차별도 없다는 의미였다. 이렇게 부자가 함께 따뜻한 사랑을 보여주자 국민 사이에서 ‘신념 있는 남녀의 결합’이라는 평가가 쏟아졌다. 왕세자 부부는 둘 사이에 낳은 남매와 왕세자빈이 혼전에 다른 남자와의 사이에서 얻은 아들과 함께 가정을 이뤄 살고 있다. ‘가정을 꾸리는 방식은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어도 그 근본인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지금 스웨덴에선 왕위계승 서열 1위인 빅토리아(33) 공주의 결혼식 준비가 한창이다. 19일 결혼식을 앞두고 지난주부터 2주 일정으로 ‘러브 2010’이라는 이름의 축제를 열어 콘서트·공연·전시회를 다양하게 개최하고 있다.

빅토리아의 신랑인 다니엘 오로프 베스틀링(37)도 평민이다. 하지만 카를 16세 구스타프 국왕도 이미 76년 평민과 결혼했기에 화제가 되지 않는다. 왕비인 질비아는 독일 출신으로 72년 뮌헨 올림픽에서 스웨덴 왕자의 통역을 맡은 인연으로 결혼하게 됐다. 신념에 따라 신분과 격식을 뛰어넘는 사랑과 결혼을 하는 스웨덴 왕실은 국민의 존경을 받고 있다. 80년에는 왕위 계승에서 남녀 차별을 없애는 현대화 조치를 했다. 왕자인 동생이 있는데도 빅토리아 공주가 왕위계승 서열 1위가 된 이유다.

문제는 베스틀링에게 선천성(유전성은 아니다) 신장 질환이 있다는 점이다. 이는 지난해 2월 약혼식 무렵 큰 문제가 됐다. 그러자 신랑 아버지가 나서 신장 하나를 아들에게 떼어줬다. 지난해 5월 이식수술을 하던 날 공주는 공식일정 때문에 그린란드에 가 있었다. 해외 순방과 외빈 접대는 왕실 의무다. 그래서 신랑감이 수술대에 누웠어도 일정을 바꾸지 않은 것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다. 왕실이 아무리 현대화해도 책임과 헌신이라는 기본은 바뀌지 않고 있다.

사족 한마디. 베스틀링은 지난해 7월 공주 약혼자 자격으로 첫 외빈 행사에 참석했다. 바로 스웨덴을 방문한 이명박 대통령과의 공식 오찬이었다. 묘한 인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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