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콤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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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호 10면

영규는 내 색시였다. 두 번째로 전학 간 국민학교 5학년 2학기 때부터. 모든 게 낯설고 어색한 전학생에게 영규는 먼저 손을 내민 친구였다. 정확하게 말하면 정말 손을 내민 것은 아니고 가만히 내 주위를 맴돌았다. 수줍게 웃으면서. 가령 만화를 보는 내 곁에서 영규는 만화도 보지 않고 앉아 있었다. 내가 “넌 만화도 안 볼 거면서 왜 있느냐?”라고 말해도 영규는 웃기만 할 뿐, 내 호주머니의 돈은 물론이고 자신의 동전까지 몽땅 만화가게 주인의 금고로 넘어갈 때까지 내 곁에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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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규네 집은 우리 집과 가까웠다. 마당에 인기척이 있어 어머니가 나가보면 열에 아홉은 영규였다. 어머니는 그런 영규를 내 색시라고 불렀다. “상득아, 네 색시 왔다.” 그럴 때마다 나는 성질을 부렸지만 영규는 색시처럼 웃기만 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누나들 때문인지 영규는 여성스러웠다. 항상 침착하고 차분하고 조용했다. 성격이 급하고 덜렁거리는 나와는 궁합이 잘 맞았다. 환상의 콤비였던 셈이다. 영규는 ‘나쁜 친구’인 나 때문에 만화방에도 가 보고 막걸리도 마셔보고 담배도 한 모금 삼켜보았다. 나는 영규 때문에 누나들이 읽던 책을 실컷 읽을 수 있었다. 보르헤스의 ‘교차하는 소로의 정원’을 읽은 것도 영규네 집에서였다. 그건 삼성판 세계문학전집 ‘세계단편문학선 3’에 들어 있던 단편이었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시립도서관에도 가고 헌책방에도 돌아다니면서 책을 읽고 사 모으기 시작한 것이다.

그날도 나는 보수동 헌책방에 가기로 색시와 약속이 되어 있었다. 친척에게 받은 용돈을 책으로 바꾸고 싶어 안달이 났던 것이다. 그날 영규는 일이 있어서 함께 가지 못했다. 사건은 꼭 그런 날 일어나는 법이다. 남포동 초입에서 불량해 보이는 형이 나를 불렀다. 아마 영규가 있었다면 그냥 지나쳤을 텐데 나는 지옥으로 들어섰다. 형은 내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다만 내 비상용 주머니에 든 5000원 말고는.

형은 좋은 말로 할 때 가진 돈을 모두 내놓으라고 했고, 나는 “미안하지만 이렇게 돈도 없이 시내로 나온 내가 나쁜 놈이지만 정말 돈이 한 푼도 없다”고 거짓말을 했다. 형은 인내심이 없었는지 내 가슴을 주먹으로 쳤다. 인내심 많은 나는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돈은 안 내놓을 작정이었다.

그때 누군가 형을 말리는 사람이 있었다. 내 색시였으면 좋았겠지만 형의 친구였다. 그는 착한 얼굴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그토록 맑고 선한 눈동자를 가진 남자를 본 적이 없다. “왜 그래? 죄 없는 아이에게.”

형은 네가 무슨 상관이냐며 으르렁거렸지만 그는 형을 무섭게 비난했다. 두 사람은 금방이라도 싸울 것 같았다. 나는 형의 친구가 나 때문에 싸우는 것이 싫었다. 그가 눈빛만큼 부드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너 정말 돈 가진 게 하나도 없니?” 나를 보호하려고 친구와 싸움까지 불사하는 이 정의의 남자에게 뭐라도 해주고 싶었다. 나는 그에게 사실 책 살 돈이 있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신사였다. “그래, 책을 사야지. 형이 담배 한 갑만 사고 나머진 돌려줄게.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저런 사람이 있는 이상 세상이 그렇게 지옥일 수는 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그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골목에 어둠이 내리고 밤이 되어서야 나는 깨달았다. 진짜 환상의 콤비는 그들이었다고.


부부의 일상을 소재로 『대한민국 유부남헌장』과 『남편생태보고서』책을 썼다. 결혼정보회사 듀오에서 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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