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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위 보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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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아편전쟁 때다. 1841년 3월 17일 청(淸)의 장군 양방은 광저우(廣州)에서 ‘청나라 군대가 적군에 대승했다’고 보고를 올렸다. 허위였다. 다음날 광저우성이 영국군에게 함락됐으니.

양방의 후임자 혁산은 한술 더 떴다. 혁산은 같은 해 5월 26일 ‘영국 함대를 침몰시키고 불태우는 혁혁한 전공을 올렸다’고 황제에게 보고한다. 그가 ‘영국과 통상을 재개하고 보상금 600만 냥을 주겠다’는 굴욕적인 조건으로 황제 몰래 영국군과 정전협정을 맺은 바로 그날에 말이다.

이중톈 중국 샤먼대 교수는 『제국의 슬픔』에서 아편전쟁의 패인을 설명하면서 “청나라 군대를 이끌던 장수들 대부분이 허위 보고를 했다. 이 때문에 황제는 매 순간 거짓말만 믿고 의사 결정을 해야 했다. 그러니 군대가 어찌 패하지 않고 견디겠는가. 그러한 국가가 어찌 망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라고 탄식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이 이런 식이었다. 전쟁으로 혼란한 틈을 타 허위보고가 난무했다. 이순신 장군도 허위보고에 희생됐다.

사연은 이렇다.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조선과의 화의를 방해하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밉다. 그의 상륙일을 알려줄 것이니 조선 수군이 무찌르라”는 정보를 조선에 준다. 이를 믿은 조정에선 이순신에게 출병을 재촉했다. 하지만 장군은 적의 간계를 간파하고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자 고니시는 “가토가 벌써 상륙했다. 아까운 기회를 놓쳤다”고 비난한다. 조정은 ‘이순신 문책론’으로 들끓었다.

선조는 성균관 사성 남이신에게 한산도로 가서 이순신의 잘못인지 확인하라고 했다. 전라도 백성들이 이순신 장군의 원통함을 호소했지만 남이신은 “가토가 암초에 걸려 7일 동안이나 머물렀는데 이순신이 머뭇거려 그만 기회를 놓쳐버렸다”고 사실과 다르게 보고했다. 이로 인해 이순신 장군은 옥에 갇혔다. 장군을 잃은 조선 수군은 왜군에게 전몰하다시피 했다. (유성룡, 『징비록』)

모두 정보를 정확하게 확인하기 어려웠던 시절의 이야기다. 그런데 천안함 사건 당시 군이 허위보고를 했다는 사실이 최근 감사원 감사 결과 밝혀졌다. 북한 반잠수정으로 의심되는 미식별 물체를 새떼라고 보고하도록 조작했단다. 사건 발생 시간도 왜곡하고 중요한 동영상을 누락시켰다고 한다. 폭발음을 들었다는 최초 보고도 상부에 숨겼단다. 지금이 임진왜란 때인가, 아편전쟁 때인가.

구희령 사회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