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딸-대통령 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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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나이 50세. 정치경력 4년3개월. 국회의원생활 만 4년이 돼가는 재선의원.

보통사람이었다면 이런 정도의 정치경력으론 중진은커녕 '중견'소리도 듣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박근혜(朴槿惠)의원은 벌써 오래 전부터 제1당의 부총재요, 대선후보의 반열(班列)에까지 오르고 있다. 정치인으로서 굉장히 빠른 속도다. 朴의원의 이런 급성장은 본인의 노력과 능력도 있겠지만 선친인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의 후광에 힘입은 바 크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는 지난주 한나라당을 탈당하면서 '여성대통령'의 등장에 강한 의욕을 보여 사실상 대선출마를 결심한 듯한 인상을 주었다. 신문 여론조사를 보면 그에 대한 지지도는 민주당의 이른바 7용(龍)중 상위권과 어깨를 겨루고 있으니 대망을 가질 만도 하다고 할까. 앞으로 어쩌면 우리는 朴전대통령에 이어 24년 만에 신(新)朴대통령을 볼지도 모르겠고, 한반도의 1차 朴-金시대에 이어 그들의 자녀에 의한 2차 朴-金시대가 열릴지도 모르겠다.

아시아 각국의 예를 보면 朴의원이 대선에 도전한다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지난날 인도에선 네루 총리의 딸인 인디라 간디가 오래 집권했고 지금 인도네시아에선 수카르노 대통령의 딸인 메가와티 대통령이, 필리핀에선 마카파갈 대통령의 딸인 아로요 대통령이 집권하고 있다. 朴의원이 또하나의 그런 예를 추가한다고 해서 이상한 일일 수는 없다. 아마 朴의원은 메가와티나 아로요의 집권을 보고 내심 피가 끓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가 정말 대선에 나선다면 문제의 본질은 그가 대통령의 딸이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대통령감인가 아닌가 하는 데 있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대통령의 딸이므로 대통령이 돼선 안된다고 해서도 안되지만, 대통령의 딸이라고 해서 대통령감이 안되는데도 대통령이 돼야 한다고 해서도 안된다. 평소의 지지자도 대선출마엔 반대자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벌써 일부에선 "그가 朴대통령 딸이라는 것 말고 보여준 게 뭐가 있느냐"는 소리가 나오고 심지어 결혼과 가정의 경험도 없는 독신여성이 국민의 삶과 세상물정을 어떻게 알겠느냐는 얘기도 한다. 아마 朴의원이 대선을 향해 다가가면 갈수록 혹독한 말은 더 자주, 더 크게 나올 것이다.

사실 정치인 박근혜는 지금까지는 온실 속에서 성장했다고 할 수 있다. 아버지의 후광, 반(反)DJ정서가 강한 TK지역, 한나라당이란 좋은 조건이었다. 그가 정계에서 단기간에 스타가 된 것도 박정희라는 큰 별에서 나온 빛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동안 YS와 DJ의 국가경영에 환멸을 느낀 국민들이 朴전대통령을 세종대왕 이상으로 '존경하는 인물'로 봤기에 朴의원이 아버지로부터 받는 빛은 매우 강력했다.

그러나 그가 이제 온실을 떠나 새로운 도전에 나선다면 빛을 받아야 빛나는 반사체가 아니라 스스로 빛을 발하는 발광체(發光體)가 될 수 있어야 경쟁력 확보가 가능할 것이다. 다시 말해 스스로 '대통령감'임을 입증해 보여야 하는 것이다. 대통령의 딸이어서가 아니라 남다른 국가경영 능력과 책임감, 정치자질 등을 보여줄 수 있어야 세력도 국민지지도 얻을 수 있다. 온실을 떠난 이상 아버지 후광의 효과도 전과 다를 것이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아버지의 부정적 측면만 집중 부각시킬 수도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정계에는 아직도 '박정희 향수'에 기대어 권력의 줄을 잡아보려는 사람들이 꽤 있는 듯하다. 그리고 DJ도 싫고 이회창도 싫은 상당수 정치인구가 존재하고, 이대로 가면 대책이 없다는 세력도 있다. 朴의원이 주목받는 것은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구심점 또는 간판역(役)으로 떠오르기 때문이다. 실제 이들 중에는 朴의원의 야망에 펌프질을 하는 사람도 있다는 얘기다. 이런 세력들이 朴의원에겐 '무대'일 수도 있다. 반면 정치3류 또는 변방세력의 이용대상이 돼 대통령의 딸로 지금껏 쌓은 것을 날려버릴 수도 있다.

생각해 보면 그는 어려운 길을 택한 셈이다. 한나라당에 그냥 남아 경선에 응했다면 지더라도 일정한 지분을 가진 당당한 비주류 지도자가 되고, 요행 한나라당이 집권한다면 최고위원·장관을 못할까. 과거에도 대선을 앞두고 이탈해 독자노선을 걸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성공한 예는 없었다. 앞으로 朴의원이 대통령의 딸일 뿐 아니라 훌륭한 대통령감임을 입증할 수 있을지는 두고 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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