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인한'권력의 칼' 술탄을 둘러싼 암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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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터키 작가의 소설을 읽는 것은 낯설고도 흥미로운 일이다. 터키하면 먼저 이스탄불(콘스탄티노플)이 떠오르는데 중세 동서양의 문화가 격하게 충돌하며 형성된 물과 비의 도시다. 과거 동로마 제국령이었던 땅을 점령하며 중앙아시아로부터 서쪽으로 진출해온 터키족이 13세기 말에 오스만투르크 제국을 세운 이래 16세기에는 아시아·유럽·아프리카까지 세력을 떨쳤다. 1922년에 이르러서야 술탄제가 폐지되었으니 그 영광과 잔혹의 역사는 무려 수백년 동안이나 길게 지속된 셈이다.

『살모사의 눈부심』은 오스만 제국이 가장 혼란스러웠던 17세기 중반을 배경으로 궁전에서 벌어지는 권력의 음모와 암투를 하렘(술탄의 후궁들이 거처하는 곳)을 관리하는 흑인 환관의 입을 통해 들려주고 있다.

프레이저의 『황금가지』를 보면 신성한 나무 둘레를 밤낮없이 돌고 있는 무시무시한 사제(왕)의 모습이 나온다. 그는 누군가 와서 자신을 죽이고 왕의 자리를 빼앗을까봐 한시도 잠을 잘 수가 없다. 인류사가 시작된 이래 다른 왕을 죽이고 권좌에 앉은 모든 자들의 운명이 이러했다. 오스만 제국의 술탄도 마찬가지였다. 왕위에 오르면 그는 형제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자식까지도 무참하게 살해했으며 반란을 진압하면 목을 벤 사람들의 머리로 높은 탑을 쌓았다.

술탄 이브라힘 역시 형이 왕위에 오르면서 죽음에 처한 운명이었다. 그는 어머니에 의해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지만 죽음에의 공포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러다 형이 돌연히 죽자 술탄에 오른다. 그는 하렘의 아름다운 후궁들에게 전혀 애욕을 느끼지 못하고 누운 채 밥을 먹어야만 하는 거대한 몸집의 여인에게 필사적으로 집착한다. 여전히 죽음에의 공포에 시달리며 세상에서 가장 큰 자궁(모성)을 찾아 밤마다 맹렬하게 도피하는 것이다.

그러다 덥기도 하고 춥기도 한 그 이상한 8월의 어느 날, 그는 자신을 구해준 어머니에 의해 감방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궁전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한 황태후가 이브라힘의 어린 아들을 술탄에 앉히고 수렴청정을 하게 된 것이다. 이브라힘이 살아날 방법은 하나 남은 아들을 독살하는 것뿐이다. 과거 제국의 역사에서 흔히 있어 왔던 일이었다. 그러나 최후의 순간에 그는 아들을 구하고 자신의 목숨을 버린다.

이 소설은 중남미 문학에서 흔히 나타나는 환상적인 색채가 짙다. 술탄과 함께 감옥에 갇혀 있다 죽는 후궁 귤베덴의 이미지가 우선 그렇다. 그녀는 어느 여인보다도 아름답지만 결코 울거나 웃을 줄 모른다. 격심한 두통에 시달리며 다만 쥐옷을 만들 때만 신성한 구원자의 모습으로 변한다. 강제급식 형에 처해져 술탄과 함께 죽어 결국 대지의 품으로 돌아가는 뚱뚱한 여인의 이미지도 마찬가지다. 흑인 환관 랄라는 서술자인 동시에 신의 대리자로서의 주술사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감옥에 갇힌 술탄에게 코란과 성경을 읽어주며 결국 자기 희생을 통해 구원에 이르게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살모사조차 눈이 부시게 만든다는 술탄의 권력. 그러나 어둠과 밝음 사이에 존재하는 신들은 때로 한없이 잔인하다. 이 세상에서 잃어버린 것은 저 세상에도 없는데 말이다. 인류에게 1천년마다 주기적으로 되풀이된다는 환멸의 명상기. 지금이 그때라면 저 신마저 잔혹했던 17세기 오스만 제국의 역사를 한번쯤 소설로 읽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윤대녕<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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