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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추가 가르쳐 준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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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배추농사를 지은 지 올해로 삼년째. 풍년도 이런 풍년이 없습니다. 노란 속잎은 윤기가 흐르고 아삭아삭 씹히는 맛과 달착지근한 뒷맛이 아주 그만입니다. 버릴 것이 거의 없을 정도로 2500포기 전부가 속이 꽉꽉 들어찼습니다.

그런데 김치공장에서 이토록 어여쁘게 자란 무농약 배추를 가져가지 않겠다는 전갈을 보내왔습니다. 여름에 미리 계약했는데, 공장에 사정이 생겨 가져가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다행히 배추 값은 보상을 해준다고 했습니다. 계약을 해 키운 배추는 대개 밭을 통째로 갈아엎고 사진을 내보여야만 보상금을 주는데, 고맙게도 배추를 알아서 처분하라는 관대한 결정까지 내려주었습니다.

하지만 갑자기 갈 곳을 잃은 배추를 보니 측은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풍년 농사로 기쁨을 주었던 그 배추가 하루아침에 근심덩어리가 돼버렸습니다. 밭에 선 채로 흰 눈을 맞아 썩게 되면 그처럼 가슴아픈 일이 없을 것이요, 갈아엎는 것은 더더욱 못할 짓입니다. 어찌할까 고민을 좀 했습니다. 다 팔지 못한다 해도 알음알음으로 판다면, 보상금까지 보태어 손해는 나지 않을 터였습니다. 하지만 남편과 저는 다른 결정을 내렸습니다. 원하는 사람 아무에게나 나눠주기로 한 것입니다.

첫 손님이 왔습니다. 시장에서 젓갈 장사를 하는 분이었습니다. 배추밭에 성큼성큼 들어가 첫 줄을 따기 시작하는데, 가슴 한구석이 쓰리기 시작했습니다. '괜찮아, 어차피 손해는 보지 않았어'. 그렇게 마음을 달랬습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후회가 되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키운 배추인데, 자식 같은 저 배추를…'.

하지만 아쉬움도 잠깐. 한 분 두 분 배추를 따가기 시작하자 오히려 마음은 담담해졌고 주인을 찾아가느라 한 줄씩 줄어드는 배추밭을 보고 있자니 조금씩 뿌듯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마을에서 배추를 심지 않은 분들에게도 넉넉히 나눠드렸습니다. 대개 밭이 없거나 건강이 여의치 않아 농사를 짓지 못하는 분들이기에 기꺼이 나눠드렸습니다. 배추를 심고 김장을 이미 끝낸 이웃집에서도 배추가 유달리 맛있다는 소문에, 거저 준다는 소문에 열 포기.스무 포기씩 더 따가기도 했습니다. 읍내의 큰 마트에서 생선가게를 하는 아저씨는 세번이나 따갔고, 민서가 다니는 어린이집에서도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따갔습니다. 그 외에도 개척교회의 목사님, 어렵사리 식당을 하는 이, 김장을 미처 하지 못한 이들이 기쁜 얼굴로 따갔습니다.

2500포기가 그렇게 하여 모두 주인을 찾아갔습니다. 얼추 세어보니 마흔 두 가정 정도 됩니다. 넉넉히 따가서 몇 집 나눠먹겠다는 분도 있었으니 실제로는 더 많은 가정이 나눠먹은 셈입니다. 적으나마 돈을 받으라고, 애써 키운 걸 왜 공짜로 주고 있느냐며 염려해주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손해본 것이 없는 터에 여러 집이 나누어 함께 행복해진다면 그것이 더 큰 기쁨이라 생각했습니다. 또 실제로 그 돈으로는 구할 수 없는 소중한 것들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우리 집 김장을 담그는 날, 이웃들이 달려와 거들어주었습니다. 배추 40포기를 담그는 데 무려 여덟명이 달라붙어 일하는 바람에 아침 여덟시쯤 시작한 일이 열시 남짓 되어 다 끝나버렸습니다. 덕분에 옷에 고춧가루 한 점 묻히지 않고 올해 김장을 끝냈습니다. 나눈 것은 배추인데 돌아온 것은 정이었습니다. 이달 안으로 앞마을로 이사갈 것인데, 가기 전에 실컷 정을 나누고 갈 수 있어서 참 다행입니다.

배추 덕에 배웁니다. 퍼주는 것이 손해보는 것 같은데 오히려 더 넉넉해지고 더 소중한 것을 얻는다는 사실을. 올해 우리 배추로 김장을 담근 사람들 모두 맛있게 먹고 건강했으면 좋겠습니다. 계약 파기로 손해를 본 김치공장도 내년에는 갑절로 이익이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정말 그렇게 됐으면 좋겠습니다.

추둘란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