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 보리 화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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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50면

인사동. 직업상 자주 가는 곳이기는 하지만 익숙하고도 낯설다.몰려든 사람들 때문일 것이다. 특히 주말이면 거리와 식당에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인사동 큰길이 아닌 골목의 화랑에는 사람들이 별로 찾아오지 않는다.

미술과 그림보다 노는데 관심이 많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어서 서운하지도 않다.

그 인사동에 있는 의자를 겸한 돌덩이에 지난해 겨울 누군가 보리를 심었다. 다른 곳에서 옮겨 심었는지 씨를 뿌렸는지 모르겠지만 새파란 보리를 보는 것은 반가웠다. 그리고 지금 그 보리는 모조리 죽었다. 날씨가 추워서인지 보리는 그야말로 전멸해버렸다. 남은 것은 딱딱하게 굳은 흙 뿐이다.

거기에 심은 보리를 처음 봤을 때 보리에 대한 모든 기억이 떠올랐다. 서릿발에 떠오른 보리 뿌리를 가라앉히느라 보리를 밟던 것에서부터 겨울 보리를 솎아다 별꽃 나물과 같이 끓인 된장국, 거무튀튀하고 미끈거리는 보리밥, 벨 때 끝없이 목을 찌르던 껄끄러운 보리 수염, 놀이처럼 즐거웠던 타작 마당.

그리고 무엇보다 보리가 누렇게 익기 전 푸릇푸릇한 보리를 몰래 베어다 구워 먹던 생각이 났다. 구운 보리 이삭을 손안에 넣고 비벼 껍질을 후후 분 다음 입에 털어넣으면 구수하고 달짝지근하던 보리의 맛과 입가에 제멋대로 묻던 검댕까지.

물론 이런 기억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이다. 단지 그렇다는 것 뿐이다. 하지만 죽어버린 보리는 그렇지 않다. 죽어버릴 보리를 왜 심었느냐고 따질 생각은 없다. 애초에 그 보리는 관상용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모든 식물이 관상용이 된 것은 동물이 동물원에 들어가고 애완용이 된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니까 우리의 문화는 거의 모든 것, 삶에 필수적인 것까지 모조리 관상용·놀잇감·애완용으로 전환시키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갈수록 확대돼 간다. 미지의 영역이던 모험과 탐험까지도 놀이와 게임으로 만드는 텔레비전의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그것을 말해준다.

어쩌면 보리나 쌀이 우리에게 중요하고 신성한 식물이라는 관념은 농경민족이라는 역사적 경험에 의해 형성된 것이리라. 하지만 사진으로만 남은 인사동 돌 화단 속의 보리를 다시 볼 때 이 모든 것들이 언젠가 사진만으로 남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터무니 없는 과장일까.

당연히 그래야 할 것이지만 주식의 자리에서 밀려나 거의 동정의 대상이 된 쌀의 운명으로 보자면 이 또한 헛걱정만은 아닐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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