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여섯마당> "2050년 서울은 아시아연합국 首都"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2050년에 한국의 서울은 아시아 연합국가의 수도가 된다."- 계룡산 도사의 말이 아니다.'21세기 문명 사전'으로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프랑스의 석학 자크 아탈리가 한 소리다. 더구나 그것은 한국 신문과의 신년 인터뷰에서 한 덕담이 아니라 미래 문명의 비전을 밝힌 저서 『프라테르니테』의 첫머리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산소원을 찾기 위해 처음으로 태양계를 벗어났던 우주선이 반세기 만에 지구로 귀환한다. 그동안 통신이 두절돼 지구소식을 모르고 있던 그들의 눈앞에는 뜻밖의 광경이 펼쳐진다. 파멸한 줄로만 알았던 인류가 대륙별로 결집해 '평화와 경제 성장의 시대, 예술이 활짝 꽃피는 시대, 인류가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한 황금시대'를 맞고 있었던 것이다. 중국과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의 여러 나라도 연합국가의 통합체를 이루고 있었으며 그 수도는 도쿄(東京)도 베이징(北京)도 아닌 바로 한국의 서울이었다.

한때 한국을 '아시아의 등불'이라고 하여 우리의 마음을 들뜨게 했던 타고르의 시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말이다. 아탈리의 아시아관은 헌팅턴의 그 유명한 문명충돌론과 똑같다. 아시아의 중국은 이슬람과 손을 잡고 유럽, 미국의 서구동맹과 대결한다. 하지만 아탈리는 포스트 냉전의 이 암울한 세계구도를 행복하고 평화로운 유토피아로 반전시키는 지표의 하나로서 한국의 서울을 아시아 연합국의 수도로 설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근거로 제시한 이론이 우리가 초등학교 교실에서 구구단처럼 외웠던 자유-평등-박애의 가치체계다. 우리가 겪었던 20세기의 냉전이란 미국으로 대표되는 '자유의 유토피아'와 소련으로 상징되는 '평등의 유토피아'의 결투였다.'자유'는 개인의 가치와 경쟁을 토대로 한 시장의 경제원리인 데 비해 '평등의 원리'는 집단의 가치와 균질을 추구하는 공동체의 정치원리다. 한쪽에서 '자유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치면 또 한쪽은 '평등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부르짖는다. 이 격렬한 죽음의 게임 속에서 자유와 평등의 유토피아는 독재의 유토피아와 악몽의 유토피아로 전락하고 만다.

이렇게 아탈리는 세계 시스템이 된 자유와 평등의 유토피아를 부정하고 있으면서도 결코 프랑스 혁명의 삼색기를 내리려 하지 않는다. 우리가 '박애'라고 번역했던 바로 그 프라테르니테의 카드 한장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프라테르니테에 바탕을 둔 세계란 모두가 존중을 받고 누구나 남의 성공을 자기 일처럼 기뻐하는 세계, 환대가 으뜸가는 가치가 되는 세계, 이제껏 서로 대립해왔던 자유와 평등을 동시에 지키고 발전시킬 수 있는 세계'라고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듣고 보니 그렇다. 누구보다도 그의 말은 한국인의 귀에 솔깃하게 들린다.우리는 냉전 붕괴 후에도 자유와 평등의 이데올로기 몸살을 앓고 있는 지구 유일의 분단국가가 아닌가. 지금도 한 입으로는 '무한 경쟁사회'를 외치고 또 한 입으로는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를 부르짖는 모순 속에서도 용케 분열증에 걸리지 않고 살아가는 국민들이 아닌가. 문제는 정말 아탈리의 프라테르니테가 과연 신약인가, 그 약효는 과연 믿을만한 것인가 하는 것이다.

불한사전을 찾아보자.'프라테르니테'란 말에는 우리가 자유 평등이란 말과 함께 금과옥조로 외웠던 '박애'란 뜻을 찾아볼 수가 없다. 형제관계,형제의 우애로 되어 있을 뿐이고 넓은 의미라 해도 동포애가 그 한계선으로 되어 있다. 엄격하게 말해서 프라테르니테는 우리가 알고 있는 박애는커녕 자매관계의 여성마저도 포함되어 있지 않은 남성원리의 말이다. 젠더와 가족과 민족을 넘어선 그런 박애가 아니다. 나치가 수백만의 유대인을 죽일 수 있었던 것도 프라테르니테가 박애 아닌 형제애로 번역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대인은 형제가 아니다. 순수한 독일 인종이 아니면, 나치당원이 아니면 모두 형제가 아니다. 형제애를 확인하려면 누가 형제가 아닌가부터 차별화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악룡(惡龍)을 죽여야 비로소 공주와 결혼할 수 있는 세인트 조지 콤플렉스의 서양 문명이다. 자유는 형제들만의 것이기 때문에 흑인 노예들에게는 자유의 여신상의 횃불은 빛이 아니고 평등은 하나의 이념만을 믿는 형제(동지)들의 것이기 때문에 굴라크 군도의 집단수용소에는 가시철망이 쳐질 수밖에 없다.

물론 아탈리가 말하는 프라테르니테와 예수님의 이웃에 대한 사랑은 결코 편협하거나 배타적인 것이 아니다. 원수에게도 다른 쪽 뺨을 내미는 박애라고 번역해도 밑질 것이 없다. 하지만 내 앞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유일신의 문화권에서는 형제와 형제 아닌 것과의 싸움으로 해가 뜨고 해가 진다.

그러므로 아탈리가 아무리 프라테르니테를 새롭게 해석해도 눈 흘기고 할퀴는 자유와 평등을 어깨동무로 합칠 수는 없다. 그것이 약효를 상실한 묵은 약이 아니라 정말 인류문명의 구명제가 되려면 각기 평행선을 긋고 있는 삼색기의 선형(線形)이미지를 서로 둥글게 어울리며 순환하고 있는 한국(동양)의 삼태극(三太極)모양으로 바꿔놓는 극적인 전환이 이뤄져야 할 것 같다. 그 자신이 '21세기 사전'에서 한방의학이 세계 의학의 주류를 이루게 될 것이라고 예견한 것처럼 삼색기의 서구 시스템에서 벗어나 프라테르니테를 한방 언어로 바꿔볼 필요가 있다. 그것이 바로 인(仁)이다.

仁이란 글자 모양 그대로 나와 너(타자)가 서로 어울리고 감응하는 사람의 능력이며 성품이다. 그래서 살구 씨를 행인(杏仁)이라고 하듯이 과실의 씨를 뜻할 때도 인이라고 한다. 모래는 물을 주어도 변하는 법이 없지만 씨앗에서는 푸른 싹이 나온다. 돌멩이는 아무리 품어도 부화하지 않지만 알에서는 병아리가 나온다. 인이 없는 자유와 인이 없는 평등은 모래와 돌멩이와 같은 것이다. 二자 그대로 인은 두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 한쪽이 없어지면 다른 한쪽도 사라진다. 인터넷을 해보면 안다. 그것은 혼자서 자동차를 운전하는 원리와는 다르다. 반드시 누군가와 접속해야만 작동하는 쌍방향성을 지닌다. 그런 시각에서 보면 오래 참아야 접속된다고 하여 인터넷을 인(忍)터넷이라고 한 한국의 젊은이들이나 인특망(因特網)이라고 표기하는 중국식 표현은 옳지 않다. 인터넷이야 말로 서로 감응하고 두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인덕망(仁德網)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지구는 많은 문화권으로 세분돼 있다. 하지만 그 원형을 찾아보면 유럽과 아시아의 두 문화권으로 좁혀진다. 기원전 500년에 헤카타이오스(Hekataios)가 그린 최초의 세계지도를 봐도 유럽과 아시아의 구분밖에는 없다. 아시아와 유럽이라는 말은 4천~5천년 전 지중해 연안의 아카트 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즉 아시아는 해가 뜬다는 뜻의 아수(asu)에서 나온 말이고 유럽(europa)은 해가 진다는 에레브(erebu)라는 말에서 나온 말이다. 그리고 오랫동안 유럽과 아시아는 해가 뜨고 지는 것만큼이나 그 생각도 달랐다. 예수님보다 나이가 많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정치학』을 봐도 유럽과 아시아의 문명비교론이 등장한다. 아시아인은 지적이지만 자유가 없는 대제국에서 산다고 했고, 이에 비해 유럽은 자유롭지만 지력이 모자라 훌륭한 폴리스를 만들지 못했다고 적고 있다.

이것을 다른 말로 옮기자면 ""아시아에는 인(仁)이란 것이 있었지만 자유와 평등이 없었고, 유럽에는 자유와 평등은 있었으나 仁은 없었다" 고 윤색할 수 있다. 오늘의 아시아는 자유와 평등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아탈리의 꿈처럼 그것을 서로 결합시키고 균형과 조화로 감응시키는 仁의 관계론을 지니고 있다. 과대망상이나 복고주의가 아니다. 서구문명에서 자유는 극단적인 경제원리로 치우치고 평등은 일방적인 정치·사회원리로 쏠렸다. 하지만 이제는 양단불락(兩端不樂)의 문화원리인 仁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자유와 평등을 어깨동무시킬 수 있는 그 자원을 갖고 있다. 그리고 인을 지오컬처(문화지리학)로 적용하면 아탈리의 결론대로 서울은 아시아의 수도가 될 수밖에 없다. 앞으로 중화(中華)로 상징되는 중국의 대륙문화와 대동아(大東亞)를 표방한 섬나라의 해양문화의 충돌을 조정해 균형과 조화를 만들어내려면 반은 섬이요 반은 대륙인 반도문화의 카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언제나 자신을 대(大)자로 생각해온 중국이 아시아(亞細亞)의 표기에 세(細)자를 쓴 것을 보더라도 알 수 있듯이 그들에게는 아시아 의식이 없었다. 탈아입구를 논한 일본인도 마찬가지다. 중국의 성장과 일본의 혼미가 이대로 가면 해양과 대륙 세력의 이마받이를 다시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국은 반도성을 잃은 지 구한말 이후 한 세기가 넘는다. 한국의 분단은 민족의 분단이기에 앞서 반도문화의 분단이기도 한 것이다. 한쪽은 대륙이 되고 한쪽은 섬이 된 것이다.

아탈리가 말하는 프라테르니테 유토피아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한반도가 통일해 반도성을 회복해야 한다. 그래야만 자유와 평등, 동양과 서양, 그리고 해양과 대륙의 갈등과 대립을 균형과 조화로 반전시키는 상생 문명의 수도 역할을 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한국은 '악의 축'이 아니라 아시아의 수도로서 미래의 진정한 유토피아를 그려내는 세계의 아름다운 '인의 축'으로 변하게 된다.

"2050년에 한국의 서울은 아시아 연합국가의 수도가 된다."- 계룡산 도사의 말이 아니다.'21세기 문명 사전'으로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프랑스의 석학 자크 아탈리가 한 소리다. 더구나 그것은 한국 신문과의 신년 인터뷰에서 한 덕담이 아니라 미래 문명의 비전을 밝힌 저서 『프라테르니테』의 첫머리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오늘의 아시아는 자유와 평등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아탈리의 꿈처럼 그것을 서로 결합시키고 균형과 조화로 감응시키는 仁의 관계론을 지니고 있다. 과대망상이나 복고주의가 아니다. 서구문명에서 자유는 극단적인 경제원리로 치우치고 평등은 일방적인 정치·사회원리로 쏠렸다. 하지만 이제는 양단불락(兩端不樂)의 문화원리인 仁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자유와 평등을 어깨동무시킬 수 있는 그 자원을 갖고 있다.

아탈리가 말하는 프라테르니테 유토피아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한반도가 통일해 반도성을 회복해야 한다. 그래야만 자유와 평등, 동양과 서양, 그리고 해양과 대륙의 갈등과 대립을 균형과 조화로 반전시키는 상생 문명의 수도 역할을 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한국은 '악의 축'이 아니라 아시아의 수도로서 미래의 진정한 유토피아를 그려내는 세계의 아름다운 '인의 축'으로 변하게 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