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반들이 풀어논 배꼽잡는 얘기 보따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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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경상북도 안동에서 있었던 일이다. 퇴계 이황 선생을 기리는 도산서원에 외국인 관광버스가 도착했다. 한 외국인이 가이드에게 '성리학(性理學)'이 뭐냐고 물었다. 미국 유학을 한 가이드는 유창한 영어로 "섹스(性)에 관한 학문의 한 종류 같은데요"라고 대답했다. "와우! 퇴계가 조선시대에 섹스 이론을 집대성했다구요?" 외국인의 반문이었다.

타고난 본성으로서의 도덕성을 탐구하는 주자학 혹은 성리학의 성(性)이란 한자가 섹스란 뜻도 담고 있기에 발생한 에피소드다. 이런 일화는 안동이 한국 유학(儒學)의 본고장이라는 역사적 경험과 맞물려 웃음의 상승작용을 일으킨다. 퇴계의 까마득한 후손 중 어떤 사람이 항렬과 촌수를 몰라 '퇴계 아재'로 불렀다는 대목에선 안동이 통념과 다르게도 '한 유머'하는 고장임을 확인하게 된다.

신간 『안동의 해학』은 조선시대부터 현재까지 안동 지방에서 회자되는 유머들의 모음집이다. 배꼽을 잡게 하고, 씁쓸한 느낌도 자아내는 90여편의 일화들엔 멋과 여유와 교훈, 그리고 지성미가 녹아있다. 세상 물정에 어두운 딸깍발이 선비의 형식주의와 숙맥짓을 비꼬거나 제사와 가난에 얽힌 내용 등이 주류를 이룬다. 이점은 안동 토박이 저자의 적절한 설명처럼 과거에 교통이 원활하지 않아 새로운 문화와의 접촉이 늦었고 또 전통 유림(儒林)의 권위가 강했기 때문일 것이다. 전통적 삶과 근대 신문물이 부딪친 개화기의 백태는 개그의 압권이다.

한 기독교 학교에서의 일화다. 교사들이 돌아가며 대표로 기도하던 일이 있었다. 문제는 기독교인이 아닌 교사의 순서일 때였다. 일류대를 졸업하고 실력있다고 평가받던 그 교사가 "하느님, 오늘도 안녕하십니까!"하는 게 아닌가. 보통 기도의 시작이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하는 식임을 몰랐던 것이다. 꼭 들어가는 '고마우신 아버지''속죄''어린 양''바라옵고 원하옵기는' 등도 없고 근면·자조·협동 등 새마을 구호 같은 것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집에서 써온 교사의 기도문은 '간단하나마 이상으로써 기도에 갈음합니다. 감사합니다'로 끝난다.

개화기의 명암이 겹치는 일화들은 단순한 웃음거리 그 이상이다. 처음 버스를 탈 때 신발을 벗고 탄 이야기, 산부인과 병원에 처음 간 불임(不姙)여인이 의사가 "옷 벗고 누우라"고 말하자 놀라며 '아, 산부인과에선 이래서 잉태를 하나보다'라고 생각하곤 "선생님 먼저 벗으시소"라고 했다는 이야기, 일제시대 돌산에 터널을 뚫을 때 다이너마이트를 몰라서 "삼대(三代)를 뚫어봐라 그게 뚫리나"라고 장담했다가 이듬해 뚫리자 머쓱했다는 이야기, 역시 일제시대 일터에 끌려가 구령을 붙일 때 앞사람이 '서른 아홉'하자 자기는 '서른 열'했다는 이야기 등은 오늘의 삶도 되돌아보게 한다.

배영대 기자

NOTE

안동발(發) 유머 하나를 덤으로 소개할 참이다. 제사 얘기다. 왼손으로만 제상을 차린 일이 있다. 아내가 "불경스럽게 왜 한 손으로 그래요?"라고 묻자 남편은 "허, 참…아까 내가 오른손으로 당신 어딜 더듬었는지 잘 알면서 그카노!"라고 했단다. 융통성이 부족함에 대한 냉소를 담은 개그였겠지만 효(孝)의 정신이 점차 쇠퇴하는 오늘엔 갸륵한 정성으로 읽히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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