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예는 누가 지키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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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한때 '금융개혁의 나팔수'라는 별명까지 얻었을 정도로 잘 나가던 김영재 전 금융감독위원회 대변인. 그는 종금사 사장에게 뇌물을 받은 혐의로 구속됐으나 최근 대법원에서 무죄 확정 판결을 받았다. "죽을 각오였다. 유죄 판결이 나면 더 살아 숨쉬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는 구치소에 들어간 순간부터 수없이 마음을 다졌다고 했다. 일단 명예회복은 했다. 그러나 요즘도 오전 3~4시면 벌떡벌떡 잠자리에서 일어나곤 한다고 그는 말한다. 억울하겠지만 '나는 결백했다'고 국민들에게 일일이 알릴 수도 없을 것이다.

본지에 최근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을 연재하기 시작한 김인호 전 청와대 경제수석. 그는 1998년 5월 환란 주범으로 몰려 구속됐었다. 죄목은 '직무유기 및 직권 남용'. 외환위기 상황 도래 사실을 은폐하고 예방·수습기회를 놓치게 했다는 것이다.1평 남짓한 감방 독실에서 그는 "권력이, 검찰이, 언론이 다 나를 잡으려하는데 꼼짝없이 갇혔구나"하고 탄식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나중에 1심 재판에서 대부분 무죄 판결을 받았다. 외환위기 본질과 직접 관련이 없는 '해태그룹 협조융자 관련 직권 남용'부분에 대해선 자격정지 형을 받았으나 그나마 이 부분도 선고 유예를 받았다.

30여년간 공직생활을 하다 청와대 경제수석을 끝으로 공직에서 물러난 또 다른 사람이 있다. 이기호씨다. 며칠 전 그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예의 보물선 사건을 물어보았다.뜻밖에 스스럼없는 답이 왔다. "오래 전 이야기라 처음엔 기억도 잘 안나더라고요. 한참 생각한 끝에 조각을 맞출 수 있었습니다."

1999년 말 무렵 이형택 전 예금보험공사 전무가 찾아와 '보물 매장 정보가 있다'고 하길래 당시 국정원 2차장에게 연락했고, 얼마 후 '사실이 아니어서 이형택씨에게 연락해줬다'는 통보를 받았다는 것이었다.李전수석은 '그게 전부'라고 했다. 그러면서 "국정원장도 잘 아는데 만약 내가 로비를 하려고 했으면 원장에게 하지 왜 차장에게 연락했겠느냐"고 덧붙였다.

내친 김에 이전부터 궁금하던 것을 물었다.

"왜 수석회의에 보고하거나 해양수산부에 말하지 않고 국정원에 알렸습니까." 답은 간단했다. "국정원 업무 규정에 있어요.국익에 도움이 될 것 같기는 한데 사실 확인은 필요하고, 국정원은 그런 일도 하는 곳입니다." 아무튼 李전수석은 이 일이 불거지며 옷을 벗었고, 특검 조사까지 받았다. 경제부처 장관으로 영전할 것이란 이야기가 나돌던 설 직전 무렵이었다. 특검 수사가 아직 마무리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뭐라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조사를 받고 나온 것을 보면 아마 별다른 혐의는 없었던 듯 싶다. 그렇다면 본인의 입장에선 상당히 억울하지 않았을까.

높은 사람들의 일거수 일투족은 감시·관찰·보도의 대상이 된다. 그러니 스스로 처신을 잘해야 한다. 요즘같이 혼탁한 세상일수록 더욱 그렇다. 명예는 자기가 지켜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본인이 할 수 없는 게 있다.

열리자마자 난장판이 된 국회가 이를 잘 말해준다. '김대중 정권은 김정일 정권의 홍위병'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는 악의 뿌리'라는 막말이 난무한다면 당사자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

명예는 타인도 지켜줘야 한다. 특히 수사기관·국회 등 이른바 끗발있는 기관들은 아무리 신중해도 지나치지 않다. 언론도 마찬가지다.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는 치명상을 입는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이기호 전 수석과 악수를 하고 헤어지다 돌아서 보니 30여년 공직생활을 졸지에 접고 야인이 된 뒷모습이 왠지 쓸쓸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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