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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 싹트는 학원 스포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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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우울한 연말이다. 여기저기서 살기 힘들다고 아우성이다. 경제 사정은 나아질 기미는커녕 내년엔 더 나빠진다는 소리만 들린다. 국민의 스트레스 내성을 키우는 데 기여하고 있는 정치권은 날치기다 뭐다 해서 더 시끄럽다. 수능시험 부정사건도 조사대상과 지역이 확대되면서 파장을 키운다. 스포츠 쪽은 좀 나은가. 그렇지도 않다. 프로야구 선수들의 병역 비리로 세상을 한바탕 뒤흔들어 놓더니 대학축구 감독들이 특기생 입학과 관련해 금품을 받은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고 있다. 해외에서는 경기장 폭력이 끊이지 않고, 미국 메이저리그의 홈런타자 배리 본즈는 근육강화제를 먹었다고 해서 떠들썩하다.

정말 우울한 연말이다. 그런데-.

검은 구름을 뚫고 비치는 한줄기 빛처럼 눈에 번쩍 띈 소식이 있었다. 지난 7일 서울시 교육청이 입법 예고한 '고교 체육특기자 선발 규칙 개정안'이었다. 비록 사회면에 크지 않게 취급된 기사지만 한 모금 청량제와 같은 소식이었다. '전국 규모 대회 3개 이상만 출전하면 체육특기생 자격을 준다'는 내용. 그게 뭐 그리 대단한가. 전국도 아니고 서울이다. 대학도 아니고 고등학교다. 법이 바뀌어도 실제로는 학원 스포츠가 달라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도 괜히 실실 웃으면서 혼자 '즐거운 상상'을 해본다.

# '4강'이니 '8강'이니 하는 특기생 기준이 없어지니까 학생 운동선수들이 1년 내내 훈련하지 않아도 될 거다. 그러면 공부하면서 운동하는 선수들이 점점 늘어날 거다. 담임선생님 얼굴도 모르는 '운동 기계'들은 사라질 거다.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는 멋쟁이? 얼마나 인기가 좋을까. 학원 스포츠가 이제 제자리를 찾아가겠구나.

# 클럽 선수도 정식 등록선수가 될 수 있다면 구태여 학교 운동부에 들어갈 필요도 없잖아. 주말을 이용해 운동할 수 있는 클럽팀이 훨씬 낫겠네. 자질이 있으면 나중에 정식 선수가 될 거고, 아니면 그냥 공부하면서 좋아하는 운동을 하면 되고. 중학 축구대회에서 '차범근 축구교실 팀'하고 '용인 축구센터 팀'이 결승전을 한다면 얼마나 보기 좋을까. 아니, 그렇게 되면 대회 명칭도 중학.고교 대회가 아니라 15세 이하.18세 이하 대회, 이런 식으로 바뀌겠지. 그러면 완전히 유럽의 클럽 시스템하고 비슷해지겠네.

상상의 나래는 마구 마구 펼쳐진다.

# 클럽 시스템이 정착되면 대회도 주말에만 할 수 있잖아. 그러면 최소한 선수 가족들은 경기를 볼 수 있겠네. 열심히 응원도 하고 분위기도 좋겠지. 사실 평일 낮에 벌어지는 경기에 누가 갈 수 있겠어. 썰렁한 분위기에서 오로지 승부만 가리는 거였잖아.

# 학원 스포츠에 뿌리 깊은 폭력도 사라지겠지. 솔직히 요즘 누가 맞으면서 운동하려고 하겠어. 때리면 학교 운동부 그만두고 클럽팀으로 가면 되지.

한참 상상하고 있는데 아이스하키는 벌써 이런 조짐이 보인단다. 지난 4일 끝난 초등학교 회장기 아이스하키 대회 1~3학년부에는 8개 출전팀 중 학교 팀은 2개밖에 없고, 6개가 클럽팀이었다. 당연히 예선 경기는 주말에만 열렸다. 더구나 클럽팀인 과천위니아와 돌핀스가 결승전에 올라 과천위니아가 우승했단다. 축구.야구.농구.배구 등도 이렇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별것 아닌 일 갖고 '오버'한 거였어도 좋다. 난제가 얽히고설킨 한국의 학원 스포츠 현장에서 한 가닥 '실마리'를 찾은 것 같아 기쁜 마음에 몇 마디 해봤다.

손장환 스포츠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