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80> 제100화 '화란주범'은 누구인가 ④ 풀리지않는 의문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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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고영복 간첩 사건이 크게 보도되도록 하기 위해 'IMF행'과 결부된 금융시장 대책을 서둘러 발표하도록 하다니.

그것도 외환 위기 와중에 경제부총리가 바뀐 날, 신임 부총리가 전임 경제팀이 만들어 놓은 정책을 검토할 새도 없이. 더구나 핵심인 'IMF행'은 뒤집어서. IMF와의 비밀 약속을 깨고 국제사회의 신뢰를 크게 잃으면서까지. 간첩 사건 발표를 가릴까 봐, 나라 경제가 백척간두에 서있던 그 순간에 그 중요한 경제 정책을 정녕 그런 식으로 발표했단 말인가.

뒤에 들으니, 재경원 간부와 직원들은 1997년 11월 19일 이임하는 강경식 부총리에 의해 금융시장 안정대책 발표가 취소되자 손을 놓고 있다가 임창열 신임 부총리에 의해 예정대로 그날 오후 5시에 발표한다고 뒤바뀌는 바람에 큰 난리를 쳤다고 했다.

도저히 납득이 안되는 일이지만, 어쨌든 1997년 11월 19일 경제수석에서 물러난 날 林부총리의 기자회견을 TV로 지켜보면서 가졌던 여러 의문 중 하나 - 임부총리가 왜 그날 발표를 강행했을까 - 는 이렇게 풀린 셈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의문은 여전히 풀리지 않은채 남아 있다. 가장 중요한 대목은 그 짧은 시간에 왜 어떻게 'IMF행'이 뒤집어졌는가 하는 점이다.

林부총리는 나중에 이것이 문제가 되자 자신이 그같은 내용을 제대로 인계받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의 모든 정황을 되짚어보면 그가 정부의 'IMF행'결정과 그 결정을 그날 발표하기로 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첫째 근거는 그를 부총리에 앉힌 김영삼 대통령이 이른바 '환란 수사' 때 검찰에 보낸 서면 답변서다.

金대통령은 97년 11월 17일 오전 11시 아·태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준비사항 보고를 들은 뒤 임창열 통산부장관만 남으라고 해 'IMF 구제금융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林장관을 부총리로 임명한다'는 말과 '16일 IMF측과 상당한 협의를 했다. 현재 금융개혁법안이 국회에 계류중이므로 국회가 끝나는 19일에 임명할 것이다. 준비를 잘하라'고 말했다고 한다.

金대통령은 또 19일 그를 부총리에 임명한 직후 고건 국무총리와 김용태 비서실장 등이 배석한 가운데 차를 마시면서도 그에게 "IMF 지원금융을 받는 것을 포함하여 姜부총리가 추진해 온 사항을 잘 승계 받아 발표를 하라"고 말했다고 한다.

나는 검찰총장이 보낸 공식 질문서에 대해 전직 대통령이 보낸 답변서 이상의 '진실'은 없다고 본다.

감사원에 대한 답변서나 회고록과는 달리 검찰 답변서는 잘못 쓸 경우 바로 형사문제가 되어 형사적 책임을 져야 하는 법률문서가 아닌가.

게다가 나도 林부총리에게 IMF 자금지원 요청 결정을 직접 알려준 일이 있다.

11월 17일 金대통령과 독대를 한 그는 내방에 들러 "IMF와 뭐가 되어가는 모양이지요"라고 물었다.

순간 나는 金대통령이 말을 해주었구나 하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金대통령에게는 IMF 자금지원 진행 상황을 자세히 보고하면서, 다만 발표 때까지 철저히 보안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 장관들에게도 알리지 않겠다고 했던 터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林장관에게 "대통령 재가를 받아 IMF와 협상을 벌여 충분한 자금지원을 받도록 캉드쉬 총재와 합의했고, 이를 조만간 발표한다"고 알려주고 보안유지를 당부했다.

林부총리는 또 19일 오전 부총리 집무실로 옮기기 전 통산부 장관실에서 김우석 재경원 국제금융심의관으로부터 이미 金대통령에게 보고된 姜부총리와 캉드쉬 총재 면담 결과를 보고받았다는 것도 확인되었다.

그날 오후 과천 청사에선 신임 林부총리 주재로 상견례를 겸한 경제장관 간담회가 열렸다.

당시 참석자 중 한 사람이었던 최광 보건복지부장관은 뒷날 우리 재판에 증인으로 나와 그날 회의에서 林부총리가 'IMF를 가야 되는데 걱정스럽다'고 이야기했다는 증언을 했다.

자, 이제 누구든 국민 앞에 그리고 역사 앞에 고백할 차례다.

누가 왜 어떻게 'IMF행'을 뒤집었는가.

정리=이상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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