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美 정상회담 긴급좌담> "햇볕정책에 한시적 파란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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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김영희=김대중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은 오늘 서울에서 한·미 정상회담과 도라산역 방문이라는 두개의 이벤트를 연출했습니다. 이번 정상회담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를 해주시죠.

▶장달중=이번 회담의 최대 성과로 그 동안 제기됐던 한반도 전쟁 위기감을 불식했다는 점을 꼽고 싶습니다. 부시 대통령은 '북한 공격을 준비하지 않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천명함으로써 그 동안 한국민이 갖고 있던 전쟁 불안감을 상당히 해소했습니다. 그러나 부시 대통령은 '자유'를 거듭 강조함으로써 비록 간접화법이긴 하지만 金대통령에게 무언의 압력을 가하는 모습을 연출하기도 했습니다.

▶백종천=당초 한국이 우려했던 것은 부시 대통령이 서울에서 또다시 '악의 축' 발언을 되풀이함으로써 햇볕정책에 찬물을 끼얹으면 어떡 하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부시 대통령은 '악의 축' 발언은 자제하고 대신 햇볕정책을 전폭적으로 지지함으로써 서울의 이런 우려를 해소했습니다.

▶김=워싱턴에서 북한을 '악의 축'이라고 했던 부시 대통령의 생각이 서울에서 변했다는 얘기입니까.

▶장=원래 부시 대통령이 사용한 '악의 축'이란 용어는 과거 공화당 행정부 시절 레이건 대통령이 사용한 '악의 제국(Evil Empire)'과 맥을 같이하는 것입니다. 공산 국가를 강경한 입장에 서서 다뤄 나가지만 대화는 하겠다는 것이지요. 부시 대통령이 서울에서 얘기한 것도 비록 부드러운 표현을 사용했지만 대북 봉쇄 정책을 기조로 하되 한반도의 특수성을 감안해 미국의 봉쇄 정책에 한국 정부의 햇볕정책을 접합시킨 형태로 대북 정책을 추진하자는 것이지요.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검증 가능한 상호주의' 같은 정책 형태가 될 것 같습니다.

▶백=부시 대통령이 이번 방한에서 '악의 축' 표현을 자제한 것도 '자유'를 기조로 하는 자신들의 세계 전략을 추진하되 한반도에서는 한국 정부의 입장과 특수성을 배려하겠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김=중앙일보는 이번 아시아 순방을 하루 앞둔 지난 15일 오후(현지시간) 백악관에서 부시 대통령과 특별 인터뷰를 했습니다. 부시 대통령은 이날도 북한 주민에 대해서는 연민과 동정을 표하면서도 북한 정권에 대해서는 상당히 부정적인 인식을 나타냈습니다. 북한을 정권과 주민으로 나눠 보는 부시 대통령의 이런 이분법적 인식이 향후 대북 정책에서도 반영될까요.

▶장=역사적으로 부시 대통령의 그같은 이분법적인 인식은 공산당에 대한 공화당 사람들의 인식을 반영한 것입니다. 1990년대 초 공산주의 국가들이 줄줄이 무너지면서 공화당이 발견한 것은 본질적으로 공산 국가는 '악의 국가(Evil State)'라는 점이었어요. 당초 미국 학자들은 비록 공산 체제가 가난하지만 '평등'은 보장돼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공산 체제가 무너지고 보니까 공산 치하에서 살던 주민들부터가 공산주의 체제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공산당에 대한 레이건의 인식이 옳았다고 생각한 거지요. 북한 체제에 대한 부시 대통령의 이런 이분법적 인식은 앞으로 대북 정책 추진에도 그대로 반영될 것입니다.

▶백=부시 대통령의 그같은 대북 인식은 햇볕정책 추진에 딜레마로 작용할 소지가 많아요. 햇볕정책은 기본적으로 북한 체제를 인정하고 북한 정권을 대화 파트너로 간주하는 정책입니다. 반면 부시 대통령은 북한 주민은 동정하지만 정권 자체는 '악의 축'으로 간주하고 있어요.

▶김=정리하면 이번 정상회담은 자유를 축으로 하는 미국의 세계 전략의 보편성과 한반도 상황의 특수성에 기초한 햇볕정책이 충돌한 현장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장=미국이 추구하는 것은 개방과 변화를 전제로 상호주의가 이뤄질 때 한국의 대북 지원을 돕겠다는 것입니다. 반면 북한 주민들의 자유가 신장되지 않을 때는 좌시하지 않겠다는 것이지요. 미국의 이같은 생각은 정책 기조에 그대로 반영될 것입니다.앞으로 북한 인권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될 공산이 큽니다.

▶김=직설적으로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이번 정상회담으로 햇볕정책은 파란불이 켜진 것입니까.

▶장=햇볕정책이 한시적으로 파란불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악의 축' 발언 이후 서울에서 반미 감정도 고조되고 하니까 미국은 일정 기간 햇볕정책을 추진해도 좋다는 고(Go)사인을 서울에 보낸 거죠. 향후 5년 간 미국은 한국에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대륙 국가에 편입하겠는가, 아니면 워싱턴-서울-도쿄(東京)를 축으로 하는 기존의 해양 국가로 남겠는가 하는 양자택일을 강요할 것입니다.

▶백=한·미 관계의 급격한 변화는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자유와 햇볕정책이 꼭 이율배반적 갈등 관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햇볕정책을 통해 북한 사회가 변화한다면 결국 자유로 연결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장=하지만 미국이 레드라인(금지선)을 설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적 이유가 있습니다. 미사일방어(MD)체제를 구축해야 하는 데다 테러 지원 국가로 의심하는 북한이 남북 대화에 호응하지 않는 상황에서 북한을 감싸안을 수 없다는 게 미국의 기본 인식입니다.

▶김=김대중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통해 한·미 간 이견이 해소됐다고 기자회견에서 밝혔는데 무엇을 주고 무엇을 받아 이견을 해소했을 것으로 보십니까.

▶장=한·미 간 역할 분담론에서 탈피해 정상회담에 앞서 미국이 요구한 대량살상무기와 재래식 무기 문제를 남북 대화 테이블에 올려 놓겠다고 얘기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金대통령이 정상회담에서 한국이 다른 어떤 나라보다 더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위협에 직면해 있다면서 대화로 대량살상무기 문제를 조속히 해결할 수 있도록 한·미가 계속 함께 노력하자고 밝힌 것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됩니다.

▶김=양국 정상의 공동 기자회견 때 재래식 무기 문제가 거론되지 않은 것은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하나요.

▶백=정상회담에 앞서 한·미 간에 충분한 사전 조율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재래식 무기는 남북한은 물론 한반도에 미군을 주둔시키고 있는 미국도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한국은 미국과의 협의를 바탕으로 북한과 대화해 재래식 무기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입장을 갖고 있는데, 이런 한국의 입장을 미국이 받아들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따라서 향후 남북 대화가 열리면 대량살상무기와 함께 재래식 무기도 의제로 다뤄질 것으로 판단됩니다.

▶김=이번 정상회담에서 북한에 대화를 촉구한 만큼 공은 북한으로 넘어간 것으로 보입니다. 북한이 대화 테이블에 나올 것으로 보십니까.

▶장=북한이 반응을 보이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일단 공을 넘겼기 때문에 한·미는 기다리겠지만 북한은 느린 템포로 움직일 것입니다. 물밑 접촉이 상당히 계속되고 나서야 구체적인 움직임이 있을 것으로 전망됩니다. 그렇지만 정세를 잘 읽고 있는 김정일이 느닷없이 카드를 꺼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어요.

▶백=공은 북한뿐 아니라 남한에도 넘어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국 정부는 이미 대북 제의를 했지만 마냥 기다릴 수 없으므로 돌파구를 만들어야 합니다. 북한도 올해 전반기에는 노력을 할 것으로 보입니다.

▶김=북·미 및 남북 모두의 현안인 대량살상무기에 대한 해결 전망을 어떻게 보십니까.

▶백=상당히 어렵다고 봅니다. 북한은 아주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에 북한에 대한 안전보장 협정 등이 이뤄져야 하는데 이 문제도 쉽게 풀릴 사안이 아닙니다.

▶장=우리도 박정희 대통령 시절 어려운 상황에 놓이자 핵 개발에 나섰듯이 북한도 체제 보장이 이뤄질 때까지는 대량살상무기 비확산 및 포기에 대해 구체적 입장을 내놓지 않을 것 같습니다.

▶김=기대를 모았던 정상회담이 남북 관계 개선에 기여했다기보다 한·미 간 갈등 해소에 초점이 모인 것으로 보입니다.

▶장=부시 대통령의 방한은 국내 여론의 분열 구조가 심화하는 계기로 작용했습니다. 앞으로 한국 정치에 엄청난 부담으로 작용할 것입니다.

▶김=마지막으로 이번 정상회담의 대차대조표는 어떻게 나올 것 같습니까.

▶장=부시 대통령의 한국에 대한 인식이 그다지 깊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한국 방문을 통해 학습 효과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양국 정상 간의 신뢰 구축 측면에서도 큰 도움이 됐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시 대통령이 한국 방문을 통해 기본 인식을 바꿀 것이라는 과대한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정리=최원기 기자

한·미 정상회담은 대북 정책에 관한 서울·워싱턴 간의 시각차를 얼마나 좁혔을까.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강조하기 시작한 '자유'는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햇볕정책에 디딤돌인가 걸림돌인가. 북한을 '악의 축'으로 낙인 찍은 부시 대통령과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을 '식견 있는 지도자'로 보는 金대통령은 의견 조정에 성공했는가. 한마디로 한·미 정상회담의 성과는 무엇인가. 전문가 좌담으로 정상회담 이후의 남북 관계와 북·미 관계를 전망해 본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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