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詩)가 있는 아침] - '수묵 정원 8-대숲'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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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장석남(1965~) '수묵 정원 8-대숲' 전문

해가 떠서는 대숲으로 들어가고

또 파란 달이 떠서는 대숲으로 들어가고

대숲은 그것들을 다 어쨌을까

밤새 수런수런대며 그것들을 어쨌을까

싯푸른 빛으로만 만들어서

먼데 애달픈 이의 새벽꿈으로도 보내는가

대숲을 걸어나온 길 하나는

둥실둥실 흰 옷고름처럼 마을을 질러 흘러간다


눈앞에 보이는 세상과 일상이 삶의 전부인 것처럼 웃고 떠들고 소리 지르고 괴로워하는 동안, 저 홀로 푸르러지는 대숲이 있다. 아무도 없는 허공에서 시퍼런 칼바람을 맞는 겨울 산이 있다. 종일 맑은 소리만 내는 계곡이 있다. 그 숲과 산과 계곡에서 나온 길은 나에게도 오고 있을 것이다. 그 길이 나에게 이르는 것을 막는 것은 일상밖에는 보이지 않는 나의 마음. 내게서 쫓겨 간 길은 숲과 산과 계곡에서 홀로 깨어 청정해지고.

김기택<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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