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형난제 골잡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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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4면

짚신 장사인 큰아들과 나막신 파는 막내아들을 둔
어머니의 자식 걱정에 얽힌 옛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비가 오면 큰 아들이 짚신을 못팔까봐, 날씨가 좋으면 나막신 장사인
막내가 장사를 못할까봐 걱정 그칠 날이 없었다는 어머니
이야기다.이탈리아 프로축구 세리에A에서
활약하고 있는 두 아들(필리포·시모네)을 둔 마리아나
인자기 여사가 1999~2000 시즌 비슷한 처지에 놓인 적이 있다.| 당시 형인 필리포 인자기(29)가 속한 유벤투스와 동생 시모네 인자기(26)가 뛰고 있는 라치오가 경기를 벌이는 날이면 어머니는 축구와 담을 쌓고 지냈다고 한다.
호사가들은 "세리에A는 인자기가의 집안싸움"이라고 떠들었다. 결국 동생 시모네의 팀이 우승, 형 필리포가 눈물을 흘렸었다. 세리에A 우승을 위해 잠시 우애를 접었던 인자기 형제는 이제 월드컵 우승을 위해 이탈리아 대표팀에서 한몸으로 뛰고 있다. 특히 이들은 '빗장수비' 이탈리아 축구에 '공격의 혼'을 불어넣어줄 주인공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이탈리아 피아첸차에서 세살 터울로 태어난 인자기 형제는 축구스타를 꿈꾸며 그라운드에서 함께 뒹굴었다. 어렸을 때부터 '골 사냥꾼'의 싹을 보였던 형 필리포는 95년 '꿈의 무대' 세리에A에 먼저 입성했다. 96~97 시즌 득점랭킹 1위(24골), 97년 명문 유벤투스 입단 등 필리포가 꽃을 활짝 피웠을 때, 시모네는 아직도 3부리그를 맴돌았다.
그러나 필리포는 틈이 나면 "시모네를 주목하라"며 동생의 가능성을 믿었고 형의 예상은 곧 현실로 나타났다. 97년 고향팀 피아첸차 소속으로 세리에A에 데뷔한 시모네는 그해 15골을 넣으며 서서히 골맛을 들여가기 시작한다. 99년 라치오로 옮긴 시모네는 이듬해인 2000년 3월 14일 챔피언스 리그 올림피크 마르세유와의 경기에서 네골을 폭발시켰다. 인자기 형제는 난형난제다.
형 필리포는 "공이 있는 곳에는 항상 인자기가 있다"는 찬사를 들을 만큼 천부적인 골감각을 가졌다. 찬스를 결코 놓치는 법이 없고 사각에서 쏘는 슛도 골로 연결되는 경우가 다반사다.
반면 스피드·파워·테크닉 삼박자가 갖춰진 동생 시모네는 신기에 가까운 볼 키핑과 드리볼로 상대 문전을 휘저으며 스스로 골을 만들어낸다. 자유분방형인 형이 "넣은 골 수만큼 여자친구도 많다"는 핀잔을 듣기도 하지만 동생은 별다른 스캔들 없이 조용하다.
인자기 형제는 '마마보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지난해 필리포가 잉글랜드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대신 AC 밀란을 택했던 이유도 바로 "어머니가 만들어 주는 파스타를 매주 먹어야 하기 때문"이라는 말도 나왔다.
인자기 형제는 세리에A에서의 명성에 비해 국제무대에서는 큰 빛을 못봤다. 98프랑스 월드컵에 출전한 필리포는 델 피에로·비에리·바조에 가려 어시스트 1개에 그쳤다. 최근에서야 대표팀에 소집된 시모네도 A매치 경력은 두 경기에 불과하다.
그러나 필리포는 지난해 월드컵 지역예선에서 일곱골을 폭발시키며 국민적 기대를 한몸에 받기 시작했다. 팀이 기록한 16골 가운데 거의 절반을 혼자 넣은 것이다. 필리포의 활약으로 '빗장수비'란 닉네임의 이탈리아 축구 이미지가 '공격도 강한 팀'으로 바뀔 가능성이 커졌다. 여기에 시모네마저 가세하면 이탈리아는 월드컵 최초로 형제 투톱을 내세우게 된다.
필리포의 폭발력과 시모네의 정교함을 장착한 이탈리아 축구는 2002월드컵에서 르네상스를 이룰 날만 기다리고 있다.
이철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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