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목소리가 바로 한국현대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6면

다섯 남자를 만났다. 세월의 무게와 성숙함이 묻어난다는 점이 유독 닮았다. 성우 탁재인(54)·김명수(54)·곽대홍(47)·신성호(47)·이승환(44)씨. 매일 오전 11시40분 한국 정치사는 이들에 의해 요리된다. MBC AM 라디오 다큐멘터리 '격동 50년'에서 이들이 박정희 전 대통령부터 김대중 대통령까지 비중 있는 전·현직 대통령 역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들 모두가 1988년 4월 1일 첫 방송 때부터 지금까지 13년째 마이크 앞을 지키고 있다. | 그래서인지 자기가 맡고 있는 역할에 대한 자부심과 집착이 대단하다. "배역에 몰두하다 보면 가끔 동일시하게 되는 경우까지 있습니다. 술자리에선 실수할까봐 긴장하는 게 아예 습관이 됐습니다." YS역을 맡은 탁재인씨의 말이다.
어찌 자세의 변화뿐일까. 그동안 차곡차곡 쌓인 사연의 부피도 제법 두터워졌다. 방송을 듣던 시청자가 성우의 연기를 착각해 "구속까지 됐던 대통령들을 방송에 초대할 수 있느냐"고 항의한 일은 애교 수준. 때론 "가만두지 않겠다"는 협박 전화도 걸려 온다.
박정희 전 대통령 역을 맡은 이승환씨는 그 동안 박전대통령의 친지·비서들에게서 헤아릴 수 없는 격려 전화를 받았다. 한 친지는 "실제 살아 계신 것으로 착각했다"며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고 한다. 평생 술을 사주겠다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사실 이들을 가장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전·현직 대통령 본인일지도 모른다. 탁재인씨는 YS와 그동안 열 번이 넘게 만났다.
2년 전 노태우 전 대통령과 성우 곽대홍씨의 실제 대화. "얼굴도 나를 닮은 것 같나요?"(노)"얼굴은 각하가 더 미남이고, 목소리는 제가 더 좋지요."(곽) "이 사람 예전에 합창단에 있었습니다. 국정 일 보느라고 하루 다섯 갑의 담배를 피워 목소리를 버렸지요. 그래도 한번 흉내 내 볼까요."(노) 노 전대통령은 그날 이승만 전 대통령의 목소리를 곽씨가 놀랄 정도로 완벽하게 흉내 냈다고 한다.
이들은 모두 훈련을 통해 익힌 노하우를 나름대로 갖고 있다. 곽씨의 경우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눈을 반쯤 감은 상태에서 가장 노전대통령과 비슷한 목소리가 나온다는 사실을 터득했다.
그러나 이들에겐 철칙이 있다. 절대 밖에 나가서는 목소리를 희화화하거나 흉내 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린 코미디언이 아닙니다. 모두가 역사의 현장을 지키고 있다는 자부심에 가득 차 있습니다."(김명수씨)
그러자 모두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이곳은 정치의 품평장이었고, 역사의 현장이었다. 현실과 다르다면, 다섯 대통령이 만났는데도 화기애애하다는 것이었다.
이상복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