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 사우디서 떠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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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의 관계가 사우디아라비아 주둔 미군 철수 문제를 놓고 삐걱거리고 있다.
미국의 중동정책에서 사우디아라비아는 필요불가결한 존재다. 아프가니스탄전쟁 때도 사우디아라비아의 프린스 술탄 공군기지를 지휘본부로 삼았다. 테러와의 전쟁에서 미국이 다음 목표로 삼은 이라크 공격에도 사우디아라비아의 협력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철수론이 나온 것은 아프가니스탄전쟁에서 사우디아라비아가 보인 비협조적 태도와 이에 대한 미국의 불만 때문이다.
철수론에 불을 붙인 것은 미국이다. 지난달 칼 레빈 상원 군사위원장은 사우디아라비아 주둔 미군을 '우호적인 나라'로 이동하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이어 18일자 워싱턴 포스트는 "미군이 너무 오래 주둔하고 있다"는 사우디아라비아 정부 고위 관리의 말을 인용, 사우디아라비아가 미군 철수를 요구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백악관은 이를 부인했지만, 앤드루 카드 비서실장은 27일 CNN-TV에서 사우디아라비아가 미군의 주둔 규모를 줄여달라고 요청해 왔다고 밝혔다.
걸프전이 끝난 후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라크의 위협이 남았다는 이유로 약 5천명의 미군을 주둔시키기로 합의했다. 이로써 미국은 중동에서 패권을 유지하는 가장 확실한 발판을 확보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라크와 또 다른 적 이란의 침략을 막기 위해 미군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후 이라크의 위협은 현저히 줄어들었으며, 이란과도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가 유지해온 '전략적 공통부분'이 좁아져 미군의 존재가 덜 필요하게 된 것이다.
한편 미군 주둔으로 인한 사우디아라비아의 국내정치 불안은 점점 커지고 있다. 이슬람 성지인 사우디아라비아에 이교도 군대가 장기 주둔하는 데 대해 분노의 목소리가 높다. 9·11 테러 주모자인 사우디아라비아 출신 오사마 빈 라덴이 주장하는 '사우디아라비아 주둔 미군 축출, 미군을 불러들인 부패한 왕정 타도'는 폭넓은 지지를 얻고 있다.
또 하나 불안 요인은 과다한 군사비 지출에 따른 경제난이다. 사우디아라비아는 걸프전에서 3백60억달러를 전비로 지출했으며, 그후 10년 동안 미국무기 구입에 3백억달러를 사용했다. 이로 인해 재정적자가 급증하고, 유가 하락으로 인한 경기 침체와 높은 실업률로 청년층의 불만은 폭발 직전이다. 이같은 조건에서 이슬람 원리주의가 급속히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 9·11 테러에 참가한 19명 중 15명이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이라는 사실이 단적인 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미국이 상황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공격을 하는 데 불만이다. 특히 미국 언론의 적대적 보도에 분노한다. 그들은 사우디아라비아 왕정이 탈레반보다 더 사악한 이슬람 원리주의 집단이라고 매도한다. 이에 대해 사우디아라비아는 미국 언론을 소유한 유대인 자본가들의 악의에 찬 음모라고 반박한다.
미군이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당장 철수하지는 않을 것이다. 미국으로선 사우디아라비아에 설치한 방대한 규모의 군사 인프라를 쉽게 포기할 수 없다. 하지만 사우디아라비아가 철수를 고집하면 달리 도리가 없다. 미군이 사우디아라비아를 떠나면 미국은 중동정책의 한 기둥을 상실하고, 테러와의 전쟁도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다.
정우량 국제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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