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詩)가 있는 아침 ] - '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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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박성우(1971~ ) '길' 전문

이파리 무성한 등나무 아래로

초록 애벌레가 떨어지네

사각사각사각,

제가 걸어야 할 길까지 갉아먹어서

초록길을 뱃속에 넣고 걸어가네

초록 애벌레가 맨땅을 걷는 동안

뱃속으로 들어간 초록길이 출렁출렁,

길을 따라가네

먹힌 길이 길을 헤매네

등나무로 오르는 길은 멀기만 하네

길을 버린 사내가 길 위에 앉아 있네


몸 밖에 나 있는 초록잎의 길을 모두 갉아먹어 갈 길을 없애버린 애벌레와 같이 길 위에 있으면서도 길이 없어 헤매는 사람들이 있다. 수없이 많은 길을 두고도 단 하나의 길이 없어 자살하는 사람들이 있다. 몸 밖에는 길이 있어도 몸 안에는 길이 없기 때문. 발로 걸어가는 길은 있어도 마음으로 난 길은 찾지 못하기 때문.

김기택<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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