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고시제도 확 바꾸자(下)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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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기업들은 갈수록 결재 시스템을 단순하게 만들고 있다. 신속하게 의사를 결정하고, 일선의 창의성을 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얀센의 경우 팀장 또는 사원이 사장과 직접 상의하고 토론한 뒤 곧바로 의사를 결정한다. 결재 라인이 한 단계뿐인 것이다.
김도경 한국얀센 부장은 "이렇게 의사를 결정하면 권한과 책임이 명확하고, 성과 평가도 투명해진다"고 말했다.
우리 정부도 결재단계를 줄이려 노력해 왔다. 그러나 기안자→과장→실·국장→(부서간 협의)→차관→장관 등으로 이어지는 다단계 결재 풍토는 거의 바뀌지 않았다.
각 부처의 장·차관실은 항상 결재를 받으려는 직원들로 붐빈다. 밀릴 때는 30분에서 1시간까지 기다리기도 한다.
1996년 정부는 초고속통신망을 설치하면서 결재서류 없는 전자정부를 구현하겠다고 했지만 원시적인 결재관행은 사라지지 않은 것이다.
계급이 공직사회를 지배하는 한 이런 결재방식은 바뀔 수 없다. 계급별로 자리를 앉혀놨으니 이를 거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계급제는 공직사회의 활력을 떨어뜨리고 전문성을 가로막는다. 또 하위직 공무원일수록 계급에 눌려 자발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 ◇계급 없애자=현재 공무원의 호칭은 5급 이상은 대외직명에 '관(官)'을 붙인다. 6급 이하는 '이(吏)'에 해당하는 주사·서기 등으로 불린다.
마치 조선시대 사또와 이방처럼 신분 차이를 확실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노동부의 한 6급 직원은 "지금의 계급제는 현대판 신분제도"라고 규정했다.
행정자치부 허명환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행정지원단장은 자신이 펴낸 단행본 『관료가 바뀌어야 나라가 선다』에서 "한국공무원으로 출세하려면 득세한 세도가의 집안 출신이거나 아니면 혼인을 맺든지 해야 한다. 아니면 고향을 잘 타고 나오든지… 계급제라는 호두껍질 속에서 이같은 각종 보험으로 게걸음을 하는 한 경쟁력을 가진 이가 적소(適所)에 근무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고 통탄했다.
정권택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승진해야 월급도 올라가고 권한이 생기기 때문에 진급을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게 된다"며 "계급제를 점진적으로 없애고 직무에 따라 대우하는 직위분류제를 채택해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외교통상부는 지난해 외무공무원법에서 계급 관련 규정을 없앴다. 대신 직위분류제를 도입해 지난해 9월 처음으로 중동국장을 공모했다. 여기에 20여명의 국·과장이 지원했다.
중앙인사위 박찬희 직무분석과장은 "평소 국장급 중에서도 한직으로 여겨지던 자리에 대거 지원자가 몰린 것은 계급제 아래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현상"이라며 "그만큼 전문가의 중요성이 호응을 얻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김창규 외교부 인사제도계장은 "이제는 고시 동기끼리 직위 경쟁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전문가끼리 경쟁을 벌이게 돼 국제적인 문제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조차 세계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1993년부터 직위분류제를 도입하고 경쟁보직제도를 실시하고 있다.

◇모든 공직을 직무 분석하자=중앙인사위원회 직무분석과장을 지낸 박기준 갈렙앤컴퍼니 대표는 "조직의 발전과 보수의 현실화를 위해서는 직무 분석을 통해 연 14조원이나 인건비로 쓰는 공무원의 직무에 대해 값을 매겨야 한다"고 말했다.
직무 분석은 ▶직무의 역할과 책임▶자격요건▶영향력▶의사결정의 재량권 등을 파악하는 작업이다.
이렇게 되면 해당 직위에 어떤 자격을 가진 사람을 앉혀야 하는지 명확해진다. 자격만 갖추면 6급도 현재 4급이 하는 일을 맡을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직위의 정확한 성격과 자격기준을 정해놓으면 장관이 바뀔 때마다 일선 사무관까지 일손을 놓고 '처분'만 기다리는 폐단도 없어지게 된다.

◇직무에 따라 봉급 차등 지급하자=대부분의 부처에서 인사과장은 승진 0순위로 꼽히는 요직이다. 그러나 국민에게 미치는 영향력이나 중요도로만 따지면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하는 부서의 과장이 더 대우받아야 한다.
전문가들은 "3급 이상에는 고위공무원단제를 적용하고, 4급 이하에는 보수등급제를 도입하는 방안을 고려해야 할 시점"이라고 지적한다.
고위공무원단은 직위에 걸맞은 인재를 공직 내·외부에서 뽑아쓸 수 있도록 하는 제도다.
또 보수등급제는 능력이나 성과가 향상되면 보수도 많이 주는 방식이다. 신분 상승에 대한 기대감 상실과 급여 수준에 대한 불만으로 우수한 공무원의 사기가 떨어지는 것을 막고, 전문성도 높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민간 기업의 평가시스템을 도입하자=세계적인 경제석학인 미국 MIT대 루디거 돈부시 교수가 "한국이 개혁을 제대로 하려면 관료를 모두 국외로 추방해야 한다"고 통박할 정도로 한국 공직사회는 반성에 둔감하다.
이춘근 LG경제연구원 경영컨설팅센터장은 "일을 잘 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공정하게 가려낼 수 있는 평가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으면 내부 경쟁을 유도하거나 조직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없게 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공직사회에 성과관리제와 다면평가제를 도입할 것을 권하고 있다.
성과관리제는 직위에 따라 목표를 설정해 이를 얼마나 달성했는지를 평가하고 이에 따라 성과급을 차등지급하는 한편 인사상 혜택을 주는 제도다.
다만 성과를 평가할 때는 처음 설정한 목표 대비 결과만 보는 것이 아니라 달성을 위해 노력한 과정을 함께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면평가제는 현재처럼 상사가 일방적으로 평가하는 방식이 아니라 본인이 먼저 스스로를 평가한 뒤 상사와 동기·부하직원들이 함께 평가하는 제도다. 이를 통해 누구나 공감하는 평가결과가 되도록 하자는 것이다.

◇부처간 교류의 문을 열자=2000년 11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기후변화협약 협상 테이블에 앉은 한국대표단은 외국 협상단 앞에서 낯뜨거운 장면을 연출했다.
외교통상부·산업자원부·환경부 소속 간부들로 구성된 대표단은 기후변화협약 비준 시점을 놓고 티격태격하다 급기야 타부처의 서류를 빼앗아 찢어버린 것이다.
환경부의 한 간부는 "부처간 인사교류만 있었어도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얼굴을 붉혔다.
인사교류로 각 부처간의 이해관계를 조율하고 이해하는 과정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98년 강원도 모 군청에 근무하던 K씨는 군수로부터 개인택시 증차 요구를 받고 이를 이행하지 않았다가 면사무소로 좌천됐다.
당시 군수의 요구를 거절해 직위해제된 과장만 다섯명이나 됐고 반대로 초고속 승진을 한 사람도 있었다. 지방공무원은 이처럼 생사여탈권을 자치단체장에게 맡겨놓은 상태다.
국가공무원과의 교류가 없어 그 지역에서만 일해야 하는 지방공무원들은 무조건 단체장의 구미에 맞게 일할 수밖에 없다.
손태원 한양대 교수는 "한번 행자부면 영원한 행자부인 현재의 인사구조는 부처간 벽을 쌓아 정책오류와 실패를 자초한다"며 "민간과 공무원을 아우르는 인력 풀을 만들어 부처 간, 국가와 지방 간, 민·관 간 인력 교류를 활성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기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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