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의 향기] 재즈 유학 떠나는 인순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6면

식물 냄새 풍기는 순박한 이름이지만 무대 위의 그녀에게 들꽃의 자취는 묘연하다. 뮤지컬 '시카고'에서 천방지축 '벨마'역이 '딱'이었는데 지금 내 앞의 그녀는 엉뚱하게도 시골 흙밭을 얘기한다.

"한탄강이 얼면 그 위에서 썰매를 탔죠." 유년기의 추억이 짐이 될 법한데 오히려 힘이 된다고 말하는 사람. 바로 가수 인순이다. 가난은 오히려 그녀를 큰 인물로 만들었다.

지난해 발표한 '인생'이 벌써 열다섯 번째 음반이라니 놀랍다. 게다가 물리적 나이로 불혹을 훌쩍 넘겼다니. 신기하다는 표현을 앞세울 뿐, 달리 방도가 없다.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설 나이. 그러나 그녀의 몸과 영혼 모두 청춘의 목차에서 앞 페이지를 벗어나 있지 않다. 지난번 중국 공연 때 현장 인기투표에서 젊은(어린) 후배들을 당당히 제쳤다며 수줍은 듯 웃는다.

그녀가 젊은 이유-하나, 이루고 싶은 게 있고 둘, 그걸 옮길 수 있는 에너지가 충만해 있다는 점이다.

지금 그녀는 2월 초 온 가족이 함께 떠날 유학 준비로 분주하다. 1990년대 초 뉴올리언스로 '재즈 구경'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길거리의 피아니스트, 트럼펫 연주자, 그리고 관객들의 자유분방한 모습이 퍽이나 살갑게 다가왔었단다.

자신은 이제껏 공식에 의해 노래를 불러왔음이 부끄러웠다. 그들은 음악이 몸에 젖어(절어) 있었던 것이다.

음악과 자신이 따로 놀았던 무지와 오만에 대해 반성하고 돌아와 취입한 노래가 트로트인 '착한 여자'다. 그러나 다소곳이 착한 여자로 머물기에 인순이는 겉이나 속이 울렁술렁 끓는 여자였다.

"지금 이 시기를 놓치면 영원히 못 갈지 모른다"는 생각이 그녀의 결심을 재촉한 듯하다. 유학 가는 학교의 이름은 '열린' 학교다. 무슨 칼리지나 아카데미가 아니라 거리와 무대에 직접 뛰어들어 온몸으로 배우는 것이다. 정말 그녀답지 않은가. 이론이나 기교가 아니라 느낌을 배우겠다는 목표 말이다.

노래방에서 누군가 서먹한 분위기를 화들짝 반전시키려고 고르는 노래, 그게 바로 인순이의 '밤이면 밤마다'이다. 그녀도 오늘 어딘가에서 '밤이면 밤마다'를 웃으며 노래한다.

그 웃음이 가식이 아님을 관객은 다 안다. 본인의 표현대로라면 그건 '헤쳐 나온 자의 웃음'이다. 돈이 아니라 그 무엇도 그녀를 가두지 못했다. 바로 '인순이의 힘'이다.

"실~버들은 천만사(千萬絲)" 그녀가 처음 희자매로 무대에 '출연 신고'했을 때 불렀던 김소월의 노랫말이 고단했던 그녀의 과거사를 농축하는 듯하다. 무대에 설 때마다 그녀는 정신을 잃는다. 관객과 함께 미쳐가는 것이다. 그녀는 뮤즈의 마녀다. 관객을 요리, 혹은 농단한다.

마녀에게 마법의 비밀, 혹은 노래하는 이유를 묻는 건 실례일까. 잠시 생각하더니 "글쎄요. 내 자체가 노래 아닐까요."이렇게 답한다. 질문한 내가 머쓱하다.

주철환 이화여대 언론홍보영상학부 교수

사진=김태성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