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 시평

민중·언론, 갈등하며 성장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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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19세기 말 시카고에서 철도 노동자들이 하루 8시간 노동과 임금인상 등을 내걸고 스트라이크를 벌일 때 시카고 지역신문은 이 운동에 일제히 비난을 퍼부었다. 시카고 트리뷴지는 "시카고가 유럽의 사회주의적 무신론적 알코올 중독 계급의 집결지로 전락했다"고 개탄했다. 집회 도중에 누군가 폭탄을 터뜨리자 경찰은 6명의 이민노동자를 체포했고 법원은 그들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시카고 언론은 한결같이 이 판결을 지지했다. 언론의 이런 반민중적인 태도는 미국 언론의 뿌리 깊은 전통의 하나로 자리잡은 지 오래다.

미국 언론은 좌파 집회건 우파 집회건 민중집회에 대해 신경질적이리만큼 부정적이다. 노동자들이 시위를 하면, 시위를 벌였다는 사실만을 보도하고 노동자들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침묵하기 일쑤다. 시위가 파업으로 치달으면 언론은 마치 준비하고 있었다는 듯이 소비자의 불편에 초점을 맞춘 기사를 내보낸다. 논설은 항상 법과 질서를 강조하며 대화와 타협을 촉구한다. 윌리엄 화이트의 표현을 빌리면 민중은 "텁수룩한 수염을 깎은 뒤에야" 비로소 언론의 자비(慈悲)를 얻는다.

이런 태도는 미국 언론에만 특유한 것이 아니다. 민중운동에 대해 반감을 드러내는 것은 세계 언론의 보편적 현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 언론도 마찬가지다. 개화기의 독립신문이나 황성신문은 반민중주의의 화신 같아 보인다. 독립신문은 의병운동이나 동학운동을 '야만의 행사'라고 질타했다. 황성신문은 의병을 '요망광혹(妖妄狂惑)이 심한 가의지도(假義之徒)'라고 매도했다. 의병을 '요사스럽고 망령되며 미쳐 정신 나간 가짜 무리'라고 하다니 극언도 이런 극언이 없다. 두 신문은 입을 모아, 민중이 생업을 놓고 들고일어나면 나라가 망한다는'창기망국론(倡起亡國論)'을 폈다. 창기망국론은 현대 언론에 의해 '데모망국론''파업망국론'으로 이름만 바꾸어 이어지고 있다.

언론은 왜 이렇게 민중운동에 대해 부정적일까. 사회과학을 하는 분들은 자본의 성격이니 뭐니 하는 만능의 잣대를 들이댈지 모른다. 그러나 언론의 반민중주의는 언론이 대자본화하기 훨씬 전에 고착했다. 그래서 학자들은 언론과 민중이 반목하는 원인을 태생적인 역할모순에서 찾는다.

민중주의는 그리스의 아고라 정신을 바탕으로 삼는다. 모든 시민이 광장에 모여 공동체가 당면한 문제에 대해 토론함으로써 바람직한 결론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민주주의의 핵심적인 가정이다. 민중주의가 기대는 것이 바로 그 가정이다.

그러나 언론은 이런 직접민주제보다는 근대 대의제도의 효율성을 더 신뢰한다. 모든 사람이 한 광장에 모이는 것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에서는 여러 정파가 민의를 대변해 토론하고 그것을 언론이 사실대로 중계함으로써 최선의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는 것이 대의제의 기본 가정이다. 대의제의 한 복판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언론으로서는 아무래도 민중주의에 대해 소극적이거나 부정적이게 마련이다.

민중과 언론의 이런 생래적인 길항(拮抗)은 해소돼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민중과 언론의 갈등은 권력 분립이니 견제와 균형이니 하는 민주주의 메커니즘과 연계되어 튼실한 공론을 창출하는 통로가 된다. 그래서 민주사회에서는 민중도 커야 하고 언론도 커야 한다. 그것도 서로 대립하면서 자력으로 커야 한다. 그렇게 하여 얻은 자생력이 생명력을 보장한다. 요즘 뉴라이트 운동에 대한 일부 언론의 편애가 눈길을 끈다. 봐주기가 정말 이례적이어서 마치 자사 사업을 홍보하는 것 같은 느낌까지 든다. 언론이 이 운동을 죽이기로 작정하지 않았다면 그런 과도한 조명은 언론 스스로 삼가야 한다. 언론이 키워주는 뉴라이트 운동은 자생력을 잃을 개연성이 크기 때문이다. 운동은 맞으며 크는 것이지 은혜 입어 크는 것이 아니다.

김민환 고려대 교수.언론정보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