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해신 - 제1부 질풍노도 (110)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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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아찬 김균정이 상대등이 되었다는 급보는 김양으로서는 상상치도 못하였던 낭보가 아닐 수 없었다.

왜냐하면 상대등(上大等)의 직위는 국왕 바로 아래의 최고관직으로 일명 상신(上臣)으로 불리는 모든 신하 중의 으뜸이었던 것이다.

법흥왕 18년, 531년에 처음 설립된 이 관직은 진골 중에서 가장 문벌이 좋은 사람이 뽑혀 모든 귀족들을 통솔할 뿐 아니라 국왕과 더불어 권력과 권위를 서로 보완하는 자리였으며, 특히 상대등은 국왕의 즉위와 때를 같이하여 교체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는데, 이는 왕위에 정당한 계승자가 없을 때에는 자동적으로 후계자로 추대되는 정치적 의미까지 갖고 있는 최고의 관직이었다.

지금까지 상대등은 흥덕대왕의 동생이었던 김충공(金忠恭)이 도맡아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왕비가 일찍 죽어 후사가 없는 대왕마마의 다음으로 김충공이 왕위에 오를 후계자로 떠오르고 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상대등이 김충공에서 김균정으로 바뀌어버린 것이다.

"돌아가셨다."

김양은 급보를 받은 즉시 상대등 김충공이 병명을 알 수 없는 급환으로 급사하였음을 꿰뚫어 보았다. 김양은 잘 알고 있었다.

김충공이 죽지 않고서는 13년 동안이나 상대등을 역임하고 있던 김충공의 자리가 이처럼 하루아침에 바뀌어 질 리가 없었다. 김충공은 선왕이었던 헌덕왕 때부터 두각을 나타내었던 당대 제일의 세도가가 아니었던가. 헌덕왕 9년에는 집사부시중(執事部侍中)이 되어 4년간을 지내다가 마침내 822년부터 835년까지 13년 동안이나 상대등을 역임했던 상신이 아니었던가.

따라서 누구든 흥덕대왕의 후임으로 그의 친동생인 김충공이 즉위하게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김충공이 갑자기 김균정으로 바뀌어버린 것이다.

"돌아가셨다. 분명히 김충공은 돌아가신 것이다."

김양은 무릎을 치면서 일어섰다. 김양으로 보면 낭보 중의 낭보가 아닐 수 없었다. 김균정이 김충공의 뒤를 이어 상대등이 된 이상 언젠가는 김균정이 대왕마마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를 것이다. 더구나 흥덕대왕은 1백50인의 도승(度僧)을 허락할 만큼 병약함은 물론 올해로 60세의 노년에 접어들고 있지 아니한가.

따라서 김양은 김충공의 급사는 감히 생각하지 못하고 대왕마마께오서 가까운 시일 내에 붕어할 것은 충분히 예측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김충공이 먼저 죽어버림으로써 뜻하지 않았던 희소식이 날아든 것이다.

김균정이 상대등이 되었다는 것은 대왕마마 다음으로 김균정이 대왕위에 합법적으로 오를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김균정이 왕위에 오를 수 있다면 김양은 순조롭게 입신양명(立身揚名)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김균정과 그의 아들 김우징은 김양이 선택한 귀한 보물, 즉 기화(奇貨)였기 때문이었다.

기화가거(奇貨可居).

'귀한 보물에게 일단 투자를 해놓는 비책'인 '기화가거'처럼 김양은 김균정과 그의 아들 김우징을 귀한 보물로 선택하고, 두 부자에게 일단 투자를 해놓았던 것이었다.

그러나 경주로부터 날아 온 급보는 낭보 뿐만은 아니었다. 또 다른 비보(悲報)도 함께 날아왔다. 그것은 김충공의 아들 김명(金明)이 새로이 집사부시중에 오른 것이다.

지금까지는 김충공이 상대등이었고, 집사부시중은 김우징이 맡아하고 있었는데, 아버지 김균정이 상대등에 오르자 김우징은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나고, 그 자리를 죽은 김충공의 아들 김명이 대신 물려받게 되었다.

이에 대한 기록이 『삼국사기』에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흥덕대왕 10년 2월. 아찬 김균정을 상대등으로 삼으매 시중 김우징은 아버지 김균정의 입상(入相)을 이유로 상표하여 해직을 청원하니 대아찬 김명으로 대신 시중을 삼았다."

왕제 김충공의 아들 김명.

죽은 아버지 대신 새로이 관직 서열 제2위에 오른 김명. 김명의 입조소식은 김균정이 상대등에 올랐다는 낭보를 또한 한꺼번에 뒤엎어버릴 흉보 중의 흉보가 아닐 수 없었다.

글=최인호

그림=이우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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