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으로 세상보기] 한송이 국화꽃에 숨은 '인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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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시인 서정주는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하여 봄부터 소쩍새가 울어야 하고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어야 한다고 했다.

봄 새의 울음과 여름 천둥이 가을꽃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이걸 지나친 과장이라거나 혹은 시인의 상상력의 세계 안에서만 가능한 일이라고 간단히 치부할 수 없다는 것을 불교의 연기론적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이러한 세계관은 과학에 근거한 세계 이해와 같은 맥락이 된다. 과학은 우리에게 피상적으로 관련 없어 보이는 것들도 그 근원에서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인간은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 때 그 원인을 추적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을 지녔다. 그래서 화재 원인을 규명하거나 범죄수사를 하면서 인과관계를 추론하기도 하고, 어떤 현상을 가능하게 하는 근본 원인이 무엇인지를 체계화하기도 한다. 화재 원인을 누전이라고 발표하는 데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한 두가지의 원인에서 어떤 결과가 발생한다는 것이 보통의 인과론에서의 입장이다.

우리가 흔히 쓰는 '인연'이라는 말은 불교 세계관의 핵심을 이룬다. 불교에서는 모든 존재가 인연에 의하여 나타난다고 보는데, 이를 인연생기(因緣生起)혹은 줄여서 연기(緣起)라고 한다.

연기는 인연에 의하여 결과가 생긴다는 보통의 인과론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여기서 因은 직접적 원인, 緣은 간접적 원인을 나타낸다. 그 예를 씨앗에서 싹이 나오는 것에서 볼 수 있는데, 여기서 씨앗은 직접적 원인이 되고 흙.물.햇빛.기후 등의 제반조건은 간접적 원인이 된다.

우리는 흔히 싹의 원인을 씨라고 지목하는데 그치지만, 연기론에서는 씨라는 직접적인 원인만이 아니라 다른 무수히 많은 간접적 원인이 성립되어야만 비로소 싹이 나온다고 본다. 이처럼 하나의 사건이란 무한한 연이 인에 결합하여 일어나는 결과라는 것이다.

이러한 간접적 원인인 연에 대한 주목은 여타의 인과론에서 볼 수 없는 연기론의 특징이기도 하고, 또한 보통의 인과율보다 포괄적인 세계에 대한 이해를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우리는 부모에게서 비롯되었으니 인은 부모님이지만 연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사람은 섭취하는 음식과 숨쉬는 공기 등의 모든 것이 제대로 갖춰져야만 비로소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데, 가령 숨쉬는 것만 보더라도 이는 지구가 21% 정도의 산소 농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호흡에 필요한 산소 기체는 태양계를 이루는 목성이나 토성과 같은 다른 행성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을 뿐 아니라 40억년 전 지구의 원시대기에도 없었던 것이다. 지구상에서 펼쳐진 40억년이라는 장구한 생명의 역사가 광합성을 통해 산소를 축적시켰고, 그 결과 생명현상을 유지하는 데 가장 적절한 산소농도가 유지되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숨쉬고 있다는 아주 간단해 보이는 사건도 사실은 40억년이라는 지구의 전 역사 위에서 전개되었던 무한한 사건들이 지금 이 순간에 중첩됨으로써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 그 모든 무한한 것들이 우리들의 연이 된다. 시인은 가을에 핀 한 송이의 국화꽃에 '머언 먼' 모든 인연이 숨어있음을 봄의 소쩍새와 여름의 천둥이라는 상징으로 나타낸 것이다.

양형진 고려대교수·물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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