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쉬쉬하며 끝낸 탈북자 간첩 사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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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탈북자로 위장한 북한 공작원이 간첩으로 암약해 온 사실이 밝혀졌다. 그는 지난 6월 자수할 때까지 수년간 남북한과 중국을 넘나들면서 국군정보사령부 시설 등 중요기밀을 북에 전달했다. 보안법 폐지문제 등으로 안보를 걱정하고 있는 마당에 또 다른 허점이 드러난 것이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어째서 이런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느냐는 점이다. 정부는 이번 사건을 인지한 후에도 몇달 동안 쉬쉬해왔다. 이번 사건이 본지 특종으로 드러난 후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탈북자 중 밀입북 사례가 있으며 이 중에 처벌받은 경우도 있지만 감찰 중인 사례도 있다"고 밝혔다. 이번 사건을 밀입북에만 초점을 맞춘 것이다. 그러나 이번 건은 가족을 만나러 밀입북하는 차원과는 달리 북의 지령을 받고 국내에서 간첩으로 활동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를 국민에게 알렸어야 할 것 아닌가. 그럼에도 이렇게 숨기니 '보안법 폐지에 악영향을 줄까봐' '남북 정상회담 때문에' 그랬다는 비판이 나오는 것이다. 정부는 더 이상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 하지 말고 진상을 낱낱이 밝혀야 한다.

차제에 우리의 탈북자 정책은 근원적인 차원에서 재검토해야 할 때가 왔다. 탈북자의 한국행은 계속 급증하고 있어 이에 대한 대책마련도 힘에 버거울 정도다. 여기에 북한이 탈북자를 이용한 대남교란책마저 구사하고 있다. 따라서 이제는 통일부 차원이 아닌 전 정부적 차원에서의 심도있는 대책마련이 시급하다. DJ정권 이후부터 급격히 사기가 떨어진 대공 관련 기관의 재정비와 역량강화를 위한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이번 사건으로 탈북자를 경원시하는 사회분위기가 형성돼서도 안 된다.

이번 사건은 보안법 폐지와 관련, 우려됐던 대목이 현실로 나타났다. 여당은 범죄행위의 정도에 따라 보안법이 폐지돼도 내란음모죄 등으로 처벌할 수 있다고 하나 이번 경우도 실제론 처벌하기 어렵다는 게 법조계의 중론이다. '분명한 간첩'을 법적 논란에 휘말리게 해서야 안보를 지킬 수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보안법 폐지는 시기상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