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격동의 시절 검사 27년 (2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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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검사의 길

12. 지청장과 동거

장흥지청의 내 사무실은 지청장실과 문 하나를 사이에 둔 2호 검사실이었다. 홍순욱 지청장 아래로 김성곤(金聖坤)검사가 1호였고 3호는 김정길(金正吉.전 법무부장관)검사였다.

처음 만난 洪지청장은 마음씨 좋은 집안 어른 같았다.

청사에서 간단하게 인사를 나눈 뒤 저녁식사가 마련된 한정식 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회식이 끝날 무렵 洪지청장이 "잠시 할 이야기가 있다"며 내 옷깃을 잡아 끌었다.

洪지청장은 회식자리에서도 "이곳까지 오게 된 사정을 잘 알고 있다. 고생스럽겠지만 잘 지내보자"고 위로를 했다.

정종 한병을 비운 뒤 나는 다음날 얘기하려던 속마음을 털어놨다.

내가 "죄송스러운 말씀을 드리겠다"며 말을 꺼내자 洪지청장은 어느 정도 짐작은 했다는 듯 "무슨 이야기인지 해 보시오"라고 말했다.

"사실 저는 이 곳에 근무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내일이나 모레쯤 서울로 올라가겠습니다"라고 하자 洪청장은 "金검사가 그런 마음을 먹고 있는 것 같아 따로 술자리를 마련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젊은 검사가 좌천성 발령을 받은 충격은 이해할 수 있지만 참으라"고 하면서 "서울에 올라가서 무얼 할 생각이냐"고 물었다.

나는 거침없이 "검찰에 미련이 없고 내가 떠나온 영등포지청(지금의 남부지청) 앞에 변호사 사무실을 열 생각"이라고 대답했다.

당시 영등포지청은 개청한 지 얼마되지 않아 인근에 변호사 사무실도 거의 없었던 데다가 나의 좌천에 대해 검찰과 법원 모두 동정적이어서 변호사 개업을 하면 경제적으로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내 말을 듣던 洪지청장은 "金검사의 그런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지만 고등고시 공부를 하고 검사를 지망했을 때 돈만 벌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자정이 넘고 정종 몇 병이 더 들어왔다. 내 고집이 꺾이지 않은 듯하자 洪지청장이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金검사, 내가 오늘 金검사를 처음 만나지만 젊고 장래가 촉망되는 고향후배라 충고 겸 내 인생 이야기를 하지. 사실 나는 자네와 달리 고등고시가 아닌 '특임(特任)' 출신 아닌가. 게다가 나이도 들고 검찰에서 출세할 가망은 전혀 없는 내가 박봉에 시골 지청만을 전전하면서 홀아비 생활을 계속하고 있는 이유를 아는가. 자식과 가족을 위해서네."

검사 월급으로 아이들 교육비와 생활비를 대기 어려워 인삼 주산지에 근무할 적에 인삼장사를 한 이야기 등 젊은 검사에게 하기 힘든 자신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하셨다.

분위기는 어느새 숙연해졌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洪지청장의 아들 한 분은 당시 서울대법대에 재학 중이었다. 현재 홍경식(洪景植)서울지검 북부지청장이 그 洪지청장의 아들이다.

洪지청장은 다시 말을 이었다.

"나에 비하면 앞길이 창창한 金검사가 초년병 시절의 이런 고생과 시련을 이기지 못하고 좌절하면 되겠는가. 金검사, 모든 걸 다 덮고 여기서 나와 함께 있는 거지"라며 대답을 받아낼 태세였다. 곧바로 대답을 할 형편도 아니었고 확신도 서지 않았다. 술자리를 마치고 여관에서 객지의 첫 밤을 맞았지만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장흥지청으로 첫 출근하는 아침 전날 먹은 술 때문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청장실에 들어가 출근 인사를 드렸더니 "여관 잠자리가 불편했지요"라고 물으시며 "金검사, 나하고 같이 있습시다"라고 하시는 게 아닌가.

장흥에서 계속 근무할 생각이 없었는 데다 퇴근 후에도 지청장과 같이 생활하는 것이 썩 내키질 않아 머뭇거린 끝에 "청장님의 호의는 감사합니다만 관사에서 지내게 되면 검사들이나 직원들 사이에 쓸데없는 오해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당분간 여관에서 생활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洪지청장은 "좁은 시골에서 검사가 여관에 계속 머무를 수 없는 것이고 검사들에게는 내가 잘 설명하지"라고 하시면서 곧바로 김성곤.김정길 두 검사를 호출했다.

두 검사가 동의하는 바람에 그 날부터 나는 24시간 동안 洪지청장과 같이 지내게 됐다.

김경회 <전 한국 형사정책 연구원장>

정리=이상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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