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가 있는 이야기 마을] 세 남매가 차려 준 생일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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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킁킁, 무슨 냄새지?'

주위는 아직 캄캄한데, 문득 코 끝에 고소한 냄새가 닿아 반짝 눈을 떴다. 시계를 보니 오전 6시. 탁탁탁, 이상한 소리까지 들렸다. 나가보니 매일 아침 두들겨 깨워도 안 일어나던 두 딸과 막내가 식탁 앞에서 부산을 떨고 있다.

"왜들 난리야!" 잠이 덜 깬 채 소리를 지르며 다가갔다. 이런 세상에…. 식탁에 미역국, 오이미역무침, 어묵볶음, 호박나물 등이 차려져 있는 게 아닌가.

"엄마! 생신 축하드려요."

그날이 내 48번째 생일이었다. 케이크는 잘라 봤어도 생일상을 받기는 처음이었다. 미역국은 고3 큰딸이, 반찬은 고1 둘째딸이 만들었고, 초등학교 6학년 막내 아들은 마늘을 까고 파를 다듬었단다. 순간 핑 도는 눈물!

맛? 참기름과 조미료를 하도 쳐대 고소하면서도 느끼한 게 이상야릇했지만, 그런 것쯤 문제가 아니었다. 연방 싱글거리며 식사를 하고 나선 출근 길. 이건 또 뭐야. 이웃들에게서 인사가 쏟아졌다. "어머, 좋으시겠어요.""자식들이 효자네요." 우리집 문에서 엘리베이터 안, 그리고 주차장에까지, 남편과 아이들이 만들어 도배해 놓은 생일 축하 포스터를 보고 건네는 말들이었다. 포스터마다 '제발 뜯지 말라'는 글이 있었지만, 이웃이 부끄러워 모두 다섯 장의 포스터를 떼어 들고 직장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학교에 출근하자마자 문자 메시지 도착을 알리는 소리가 끝도 없이 울려댔다.

'아줌마, 생신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아이들의 친구들이 보내온 생일 축하 메시지였다. 어떻게 내 생일을 알았지? 궁금증은 곧이어 온, 다른 메시지에서 풀렸다.

'근데요, 주은이(둘째딸)가요, 메시지 안 보내면 혼내 줄 거라고 해서요….'

친구들에게 부탁도 하고, 협박까지 해서 내게 메시지가 쏟아지도록 한 것이었다.

세 명이 밤을 새고 서로 토닥거리면서 포스터를 그려 붙이고, 생일상 차렸을 모습을 생각하니 24년간 직장생활을 하면서 셋을 키우느라 힘들고 어려웠던 기억들은 봄날 눈 녹듯 스러져 버렸다. 자식농사 잘 지었다는 동료 교사들의 부러움 속에 올해 생일은 이렇게 영원히 잊지 못할 매우 특별한 기념일로 남았다.

나는 너희에게 다른 엄마들보다 특별히 더 잘 해 준 것도 없는데, 너희는 엄마를 이렇게 행복하게 하는구나. 얘들아, 그날 난 고맙다는 얘기도 제대로 못했지. 쑥스러움이 앞섰기 때문이란다. 늦었지만 너희 자랑도 하고, 또 고맙단 말도 전하고자 이제야 펜을 들었단다. 그땐 이웃들 앞에서도 부끄러워했지만, 이제 엄마는 온 세상 사람들에게 그 얘기를 하고 싶단다.

이강혜(48.교사.경기도성남시분당구서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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