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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찬 총리의 걱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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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며칠 전 이해찬 총리를 만났다. 몇 사람이 식사를 함께 했다. 그는 경제 걱정을 많이 했다. "내수(內需)가 안 좋아 고민이 크다"고 했다. '한국형 뉴딜'은 그의 아이디어였다고 하면서 "수요(내수)를 보다 빨리 창출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래야 이 어두운 터널을 빨리 통과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런 그에겐 더 큰 걱정거리가 있었다. 역사와 국민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일하면서 늘 염두에 두는 것은 참여정부가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었다는 기록을 남겨야겠다는 점이다. 민주화세력이 집권하더니 나라를 망쳐 먹었다는 말은 듣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한다. 민주화세력이 정권을 잡아 고생도 하고 욕도 먹었지만 그래도 그때 나라가 바로 섰다는 얘기는 듣도록 해야겠다는 것이다. 그래야 나라도 싹수가 있는 것 아니냐."

이런 말도 했다. "참여정부를 좌파적이라고 보는 사람은 (국민의) 25% 정도다. 그러나 '개혁이 미숙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70%나 된다. 만일 우리가 성과를 못내면 국민은 비판하는 데서 끝내지 않고, 아예 우릴 아웃시켜 버릴 것이다. 그러니 잘해야 한다."

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운 총리가 늘 역사와 국민을 의식하고 있다고 하니 반가웠다. 참여정부의 미숙성을 인식하고 있는 것도 다행스러웠다. 그래서 잘 해보겠다는 그의 다짐이 빈말로 들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각오가 좋다고 해서 평가가 절로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실질이다. 총리 말대로 성과를 내야 한다. 그런데 그게 잘 될지는 미지수다.

지금 정권 주체들의 머릿속은'동굴의 우상'이 지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든다. 그들이 동굴에 틀어박혀 자기들 눈에 비친 그림자만 옳다고 믿는, 그래서 바깥 사람들의 경험과 지각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독선에 빠진 것처럼 보인다는 얘기다. 신행정수도특별법이 위헌이라고 한 헌법재판소를 마구 욕하는 여당 의원들의 태도가 한 예다. 말로는 '기업이 곧 나라'라면서도 기업의 입장은 거의 외면하는 입법을 하려는 것도 그 범주에 해당한다.

이 정권에선 비정상이 너무 자주 출현한다. 육군 인사비리 의혹에 대한 투서로 군 검찰의 수사가 시작되자마자 청와대 일각에선 "육군총장은 물러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말이 나왔다. 총장의 혐의가 나타나지도 않은 상황에서 그런 얘기를 하는 게 정상인가.

통합거래소 이사장 후보 추천 과정도 괴상하다. 청와대 등 여권이 희망한 인사가 추천위 심사과정에서 탈락하자 여권의 불만이 터져 나왔고, 추천된 후보 세 사람은 곧바로 사퇴했다. 청와대는 개입설을 부인하지만 누가 봐도 이상한 일인 것만은 틀림없다.

이래서야 나라에 싹수가 있을 리 없다. 이젠 일을 일답게 해야 한다. 그러려면 '동굴'에서 나와야 한다. 사고의 폭을 넓혀야 한다. 이 총리는 칠레에서 열렸던 한.미 정상회담이 성공적이었다고 말했다. 과거에 있었던 우리의 핵물질 실험이 유엔 안보리에 회부되지 않은 것도 정상회담이 잘 됐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라크 파병을 한 게 컸다. 그게 없었다면 (대미 관계에서) 굉장히 힘들었을 것이다"고 했다. "외교는 선악이 아니고 주고 받는 것이더라"고도 했다.

정부.여당이 이라크 전쟁을 선(善)이라고 보지 않으면서도 장병을 보낸 것은 국익 때문이었다. 그건'코드'의 극복이자 사고의 전환이었다. 이제 그런 현실 인식이 국정의 다른 분야로 확장됐으면 한다. 그래야 성과가 나올 것이고, 집권세력이 국민에게서 '아웃'당하는 일도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이상일 정치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