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통계 권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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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냉전시대에 미 정보당국이 가장 관심을 기울였던 첩보는 역시 소련의 군사무기 개발에 관한 것이었다. 세계 도처의 번화가나 으슥한 비밀장소에서 비밀요원들이 소련 군사기지나 병기에 관한 특급비밀들을 거래했다.

그러나 워싱턴에서 통계를 다루는 미국 전문가들은 이런 스릴 넘치는 장면과는 거리가 먼 조용한 사무실에서 소련의 군사정보를 캐내는 작업을 벌였다. 그들은 소련의 주요부서에서 발간된 공식 또는 비공식 자료나 각종 학술서적 등을 입수해 주요 데이터를 면밀히 분석하는 데 열중했다.

예를 들면 구리.철의 생산량뿐 아니라 특수합금을 만드는 기초원료들이 어느 지역에서 채굴돼 제련됐는지를 추정하고 어떤 종류의 병기제작이 가능한지를 가늠했다. 첩보위성이 개발되기 훨씬 이전인 이 단계에서는 강수량 등으로 농산물의 풍.흉년을 예측하고 민간용 곡식을 제외한 나머지 양곡통계로 국경선에 배치된 병력과 예비병력까지를 추정했다.

영국으로 망명했던 반나치주의자들 가운데서도 통계를 다룰 줄 알았던 일부 전문가들은 철저히 보도관제된 상태에서 만들어진 독일신문을 분석해서 정보를 캐냈다. 나치 내부에 스파이가 잠입해서 탐문한 정보와 전혀 다를 바 없을 정도의 정확한 군의 이동상황을 파악하는 데 성공하기까지 했다.

결혼란이나 부음란에 등장하는 인물 그리고 각종 행사가 이뤄진 시간과 장소, 동원된 군중규모 및 일기예보 변화 등에 관한 자료가 훌륭한 첩보로 가공됐다. 사회주의 국가들의 통계정보 통제는 매우 엄격하다. 북한의 경우는 거의 군사비밀로 다뤄진다.

통계는 물적증거가 제일인 세상에서 적지않은 호소력을 가지고 있다. 숫자감각이 무뎌 보이는 정치인들조차도 통계를 들이대며 대중들에게 다가선다. 때로는 경제문제를 다뤘다는 전문가들조차 정계에 입문하고서 통계를 오용(誤用)하는 사태도 빚어진다.

야당의 대정부 공격자료나 행정부의 자화자찬식 감사, 치적자료에도 그런 경향이 나타난다. 이보다 더 우려스러운 일은 특정통계가 비공개에 부쳐지는 공공부문의 폐쇄성이다.

최근 한국개발연구원이 주최한 소득분배 토론회에서 학계 전문가들은 정부나 산하단체들이 일부 통계를 움켜쥔 채 이를 해당부서의 권한으로 여기는 '통계의 권력화'현상을 성토했다. 통계청도 비난의 대상에 올렸다.

개인의 구체적 인적사항을 지운 국민 납세자료마저 입수가 어려워 소득과 소비, 저축, 빈부의 격차, 투자성향 등을 정확히 예측하기가 어렵다고 전문가들은 주장한다. 통계의 비밀주의는 어디까지 가능한가.

최철주 논설위원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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