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훈범의 세상사 편력] 지혜의 보석에 겸손의 테를 둘러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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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39세 판사가 69세 소송 당사자를 “버릇없다”고 꾸짖어 입방아에 오른 적이 있습니다. 길거리에서 사소한 시비가 붙어도 “몇 살이나 먹었느냐”는 연장자 확인작업이 우선일 만큼(때로는 주민증 대조까지 벌어지는 중요한 의식입니다) 경로사상 투철한 동방예의지국에서 서른 살이나 더 먹은 사람에게 버릇 운운한 것은 아무리 판사님이라도 ‘버릇 있는’ 행동이라고 할 수 없겠죠.

물론 그 말이 괜히 나온 건 아닐 겁니다. 법정 질서를 무시하고 자꾸 끼어드니까 경고 차원에서 한 말 아니겠어요. 하지만 사건이 기사화되자 여기저기서 “나도 당했다”는 제보가 꼬리를 문 것만 봐도 평소 판사님들의 말 품새가 꼭 우아하지만은 않은가 봅니다. 모르긴 해도 범죄자들을 자주 만나는 검사님들의 입 역시 더 나을 거라고 생각되진 않는군요.

그 어렵다는 사법시험 합격하고도 사법연수원에서 밤잠 안 자고 경쟁해 판검사로 임용된 훌륭한 사람들이 왜 그럴까요? 답은 너무 훌륭하기 때문입니다. 남들 놀 때 열심히 공부했으니까 보답받아야 하는 거지요. 내가 공부할 때 논 사람들은 좀 무시해도 되는 거고요. 내가 잘나 높은 자리에 올랐으니 못난 사람들은 내 판단에 따라야 하겠지요. 못난 사람들이 잘난 사람한테 밥 한 번 사는 게 무에 그리 눈 흘길 일일까요…. 이런 자만 이 머릿속에 차 있으니 막말 판사가 나오고 스폰서 검사가 나오는 겁니다. 많은 사람이 수긍하지 못하는 ‘튀는 판결’도, 맘먹은 대로 될 때까지 하는 ‘별건 수사’도 다 거기서 나오는 거지요.

청소년 여러분, 그런 걸 보면 화나시죠? 그 마음 간직하세요. 출세한 다음에도 오만 대신 겸손을 가지세요. 없다면 억지로라도 만드세요. 그 겸손이 여러분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겁니다. 고대 중국의 사상가 순자도 말했습니다. “아무리 날카로운 무기라도 예의 바르고 겸손한 태도만큼 이익이 되는 건 없다”고 말이지요.

그가 겸손의 최고봉으로 꼽은 사람이 춘추시대 초나라의 명재상 손숙오였습니다. 어느 날 누가 손숙오에게 물었지요. “관직에 오래 있으면 선비들이 질투하고, 봉록이 많아지면 백성들이 원망하며, 벼슬이 높아지면 군왕이 미워한다고 들었습니다. 지금 대인은 관직에 오른 지 오래됐을 뿐 아니라 봉록도 많고 자리도 높습니다. 세 가지를 모두 갖췄으나 초나라 임금과 선비, 백성 중 대인을 미워하는 자가 없습니다. 어찌 그렇습니까?”

손숙오의 대답은 이랬지요. “나는 지금 초나라 재상 자리를 세 번째 하고 있지만 더욱 겸손하려 노력하네. 봉록이 높아질 때마다 더 많이 베풀고, 지위가 높아질수록 주변 사람들에게 더 예의 바르게 행동했네. 내가 초나라 선비와 백성들에게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네.”

‘죄’라는 표현에 밑줄 치세요. 겸손하지 않으면 그저 “버릇없다”고 욕먹는 걸로 끝나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겸손이 없는 자리는 필히 오만이 차지하게 되고, 그건 곧 오만한 판단이나 결정으로 이어지게 마련이지요. 그 결과는 안 봐도 비디오 아니겠어요? 여러 사람 마음에 상처를 남겨 죄를 짓게 되는 겁니다.

『주역』에도 그런 경고가 있습니다. “하늘의 도는 찬(滿) 것을 일그러뜨려 겸손한 자를 보태 주고, 땅의 도는 찬 것을 변화시켜 겸손으로 흐르게 하며, 귀신은 찬 것을 해치고 겸손한 자를 복 주고, 사람은 찬 것을 싫어하고 겸손한 자를 좋아한다.” 하늘이나 땅이나, 귀신이건 사람이건 스스로 꽉 찼다고 여기는 오만한 사람을 싫어한다는 얘깁니다. 그러니 겸손해야 복을 받는 겁니다. 주역의 64괘 중에 겸괘(謙卦) 하나만이 유일하게 여섯 효사(爻辭)가 모두 길한 것도 그런 까닭이지요.

너무 겁을 줬나요? 하지만 오만을 겁내는 건 아무리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설령 죄까지는 안 가더라도 자신의 발목을 붙들어 맬 장애물이 될 테니까요. 마오쩌둥(毛澤東)도 말했습니다. “겸손은 사람을 발전시키고 교만은 사람을 낙후시킨다.” 그런 어록을 남긴 마오쩌둥 자신도 말년에 교만에 빠져 이성을 잃고 말았으니까요.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기 싫어 여러분 나이 또래의 홍위병들을 이용한 문화대혁명, 그 실체가 뭔지 다 아시잖아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겸손은 여러분을 지키고 여러분을 발전시킬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것입니다. 러시아 소설가 막심 고리키의 말을 기억하세요. “지혜의 보석에 겸손의 테를 두른다면 그 사람의 인격은 더욱 더 찬란하게 보일 것이다.”

이훈범 중앙일보 j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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