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하 9번째 시집 '유목과 은둔'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0면

시인 김지하(63.사진)씨가 아홉 번째 시집 '유목과 은둔'(창비)을 펴냈다. 2002년 '화개(花開)' 이후 2년 만이다. 시집에는 그간 문예지들에 발표한 시들과 공개하지 않았던 시 30편을 더해 모두 94편의 시가 담겨 있다.

김씨는 시집 뒷부분 '시인의 말'에서 "아마 내 시집 중 가장 허름하고 가장 허튼 글모음일 듯하다"고 밝혔다.

"허름한 것은 '졸(拙)'이고 허튼 것은 '산(散)'이니 둘 다 혼돈에 속하고, 뒤에 숨어 있어야 할 생각의 뼈대들이 앞으로 튀어나와 천장을 치기도 한다"는 것이다. 김씨는 그러나 "허름하고 허튼 것들이 이상하게 가엾어서 행여 풀이 죽어 스스로 흩어져 없어지기 전에 서둘러 묶는다"고 밝혔다.

2부에는 9.11 테러와 마이클 무어 감독의 영화'화씨 9/11', 동북공정과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등 현실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한 시들을 모았고, 3부의 시들은 선(禪)적인 냄새를 풍긴다.

1부에 묶인 시들이 김씨의 변에 걸맞은 '허름하고 허튼 것'들이다.

"시 짓고/그림 그리고//가끔은/후배들 놀러와//고담준론도 질퍽하게/아아/무엇이 아쉬우랴만//문득 깨닫는다//죽음의 날이 사뭇 가깝다는 것."

시인의 일상이 들여다보이는 '김지하 현주소'라는 제목의 오른쪽에는 '김지하 옛주소'라는 제목의 시가 나란히 실려 있다.

예전 그는 "시를 쓸 때는/목숨을 걸었었다". 또 모든 우울한 것들을 깨알 같이 적어 검은 노트라고 이름붙였던 당시의 자신의 정신풍경은 "매독환자" 아니면 "아편쟁이"라고 썼다.

죽음에 대한 시인의 인식은 여러 편에서 보인다.

'선풍기 근처에'에서는 "책을 읽으면/두 눈이 쓰라리고//글을 쓰든가 먹을 잡으면/정신이 왼통 어지럽다"며 "죽음이 선풍기 근처에 와/빼꼼이 날 쳐다보고 있다"고 썼다.

표제작 '유목과 은둔'은 허름하지도 되지 못해 보이지도 않는다.

"의리(義理)가/낮은 샘가에 피묻은 채 머물고/온 허공에 수만 가지 꽃, 꽃들이/어지러이 피어/어찌 나갈까/저 먼 쓸쓸한 바다까지/가 마침내 내 두 아이를/만나 기어이/데리고 돌아올까/유목과 은둔의 집이여/오랜 내 새 집에."

시인은 먼 데까지 나가 두 아이 '유목'과 '은둔'을 거둬오고 싶은 것으로 보인다.

신준봉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