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연홍의 정치보기] DJ와 권노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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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지난주 민주당의 한 실세 의원을 만났다. 그가 흥미로운 얘기를 해주었다. 자기도 들은 얘기라고 했다. 내용인즉 이렇다. 얼마 전 권노갑 전 고문이 미국 시애틀에 있는 아들 정민씨에게 전화를 걸었다고 한다. 다짜고짜 목포에서 출마할 준비를 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목포는 DJ의 장남 김홍일 의원의 지역구다. 대통령 아들의 지역구를 빼앗겠다는 거였다. 사실이라면 엄청난 얘기였다. 權전고문에게 직접 확인해봤다.

"말도 안되는 소리." 그의 일성이었다.

"정민이는 곧 하버드나 MIT에서 MBA를 시작할 예정이오."

확인해보니 權전고문의 말이 맞았다. 정민씨는 시애틀에 살지 않았다. 살긴 살았지만 지금은 신시내티로 옮겼다. 제너럴 일렉트릭에 다닌다. 재료공학 석사 출신이지만 경영학 공부를 시작할 예정이란다. 아버지의 강권을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소문은 사실과 달랐다.

그러나 유사한 소문들이 더 있다. 權전고문이 누구를 위협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결국은 하나로 집약된다. DJ와 權전고문의 갈등설이다. 그것의 진위부터 가려야 했다. 權전고문에게 물었다.

"DJ와 갈등같은 게 있나요."

"그런 거 없어."

"장기외유 권유를 거부했잖아요."

"그런 얘기를 나한테 한 적이 없어."

"박지원 전 청와대 수석이 전하지 않았나요."

"잘못 알려졌어. 그런 적 없어."

소문과는 다른 대답뿐이었다. 측근을 만나봤다. 다소 다른 말을 했다. 朴전수석이 외유를 권한 건 사실인 것 같다고 했다. 물론 DJ의 뜻이 실렸음도 알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게 전부였다. DJ는 더이상 요구하지 않았다고 한다. 둘이 만났다는 소문도 사실과 달랐다.

오히려 權전고문은 전화라도 걸려올까봐 걱정했다는 것이다. 그럴 경우 거부할 수 없기 때문이다.그러나 전화마저 없었다. 결국 權전고문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챘다는 얘기다. 외유 권유를 받지 않았다는 權전고문의 말뜻을 알 만했다. 동교동 사람들도 이를 뒷받침했다. 이훈평 의원의 말이다.

"내가 알기론 DJ가 權전고문에게 나가라고 강요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닙니다. 모르고들 하는 소리예요."

김옥두 의원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결국 DJ와 權전고문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라는 것이다. 강요도 있을 수 없고 거부도 있을 수 없다는 얘기다. 야당의 견해도 같았다.

하순봉 부총재는 이렇게 봤다. "DJ와 權전고문은 묵시적으로 굳게 연결돼 있어요." 최병렬 부총재도 동조했다. 두 사람간 큰 문제는 없다고 봤다. 결국은 權전고문이 물밑에서 DJ대리역을 할 걸로 봤다. 그렇다면 갈등설은 왜 나올까.

"DJ가 손을 뗀 것처럼 보이려는 거겠지."

하기야 그래야 일하기가 쉬울 것이다. 야당의 공격도 피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갈등설이 누구 입에서 나왔는가를 음미해야 할 것 같다. 이른바 실세라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다분히 의도적인 측면도 있어 보인다. 權전고문이 움직이더라도 DJ와는 상관없다는 것을 미리 알려두려는 것 같다.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닐지 모른다. 갈등의 흔적도 있다.

사람인 이상 이런저런 섭섭함도 표했을 것이다. 그러나 소문만큼은 아니다. 때문에 한나라당은 DJ를 링에서 내려보내지 않으려고 한다. 손을 떼건 말건 계속 링에 붙잡아두겠다는 것이다. 그래야 DJ대 반(反)DJ가 유지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회창 대 반 이회창을 막는 길이라는 것이다.

이연홍 편집위원(정치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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