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1. 샛강<4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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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등교 길에 보면 가끔씩 허름한 판잣집 동네에 새끼줄을 쳐놓고 붉은 종이 조각을 매달아 놓은 데가 보였는데 전염병이 번진 곳이라고 했다. 당시에 전염병은 어찌된 일인지 일선지방에서부터 극성을 부리며 후방으로 내려오곤 했다. 염병이 티푸스와 다른 것인지 같은 것인지 모르지만 염병이 돈다고들 어른들이 말했고 얼마 안 가서 뇌염도 돌기 시작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그 난리 통에도 수도와 전기가 끊기지 않고 공급되었던 것은 신기한 일이었다. 물론 전쟁이 도시 전체를 휩쓸며 다가올 무렵의 며칠 동안은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수도는 여전히 나왔다. 전선이 멀리 물러가고 나면 다시 기적처럼 전깃불이 들어왔고 밤 열 시가 넘으면 절전한다고 불이 깜박 나갔던 것 같다. 우리는 잠들기 전에 아버지만 빼놓고 모든 식구들이 둘러앉아 그 삼십촉짜리 전등 불빛 아래서 열심히 무엇인가를 했다. 내복을 모두 벗어들고 앉아서 누나들과 어머니와 나는 신문지를 펴놓고 그 위에 이를 잡아서 털어 놓았다. 옷의 솔기에 하얀 서캐가 줄줄이 붙어있곤 했다. 어머니는 참빗으로 누나들의 머리카락에 붙어 있는 서캐들을 훑어내곤 했다. 전후에 오랫동안 그런 모습은 거의 풍속이 되어 있다시피 하더니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육십년대에 연탄이 주요 땔감이 되면서부터 없어졌다고 한다. 아마 살기가 나아져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지방에서는 대개 칠십년대까지 그랬다고 한다. 우리가 군대에 갔던 무렵에도 내무반에서 단체로 이 사냥을 하는 시간이 있었을 정도였다. 더구나 지방의 감옥에는 팔십년대 초까지 이와 빈대가 있었다.

시장은 점점 번성했다. 피란을 나갔던 사람들이 옛 터전으로 돌아왔고 북에서 내려온 사람들도 대개는 촌보다는 도시에서 생계를 찾아 정착했다. 그리고 좌우의 대립 속에서 정신없이 들볶이다 살아남은 지방 사람들 중에서도 도시로 나와서 새로운 살 길을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 우리네 시골에 가면 곳곳마다 같은 성씨 동네가 있게 마련인데 학자들 말로는 대개 이백오십년에서 삼백년 가까이 되었다고들 한다. 이는 임진왜란 뒤에 성씨 동네들이 형성되었다는 뜻이란다. 그러고 보면 아마 그 옛날에 수십만의 동아시아 군대들이 전 반도를 휩쓸며 전쟁을 치렀을 테니 먼저 있던 동네들은 잿더미나 쑥대밭이 되고 재편성된 흔적이 분명하다. 그러고 두 번째가 육이오였고 세 번째가 칠십년대의 근대화 시절이라고 한다. 시장 주변에 웬 노점이 그리도 많이 생겼는지 학교에 오갈 때마다 나 같은 꼬마는 사람에 치여 걷지도 못할 정도였다. 시장 주변에는 전에는 보도 듣지도 못하던 먹거리들이 흔전만전이었다. 수제비, 순대, 부침개, 개떡, 찐 고구마, 찐 감자, 실고추를 넣은 양념 우무, 수수 전병, 오뎅 등속은 그래도 부모의 손목을 잡고 나가야 얻어걸리는 음식이고, 근래까지 보이던 설탕에 소다를 넣고 만드는 뽑기 사탕, 삶은 고둥, 번데기, 함석 통에 얼음과 소금을 뿌려 얼린 아이스크림과 아이스케키, 그리고 왕건이가 들어 있는 저 유명한 꿀꿀이 죽, 이런 것들은 내가 거의 사먹을 수 없었던 선망의 군것질거리들이었다. 물론 나는 동네 아이들의 신세를 지면서 십원에 한 그릇씩 하는 꿀꿀이죽의 맛을 본 적이 있다.

그림=민정기
글씨=여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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