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배명복의 세상읽기

도전받는 GDP 신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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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기자가 사는 곳은 경기도 고양시 일산이다. 신도시라는 게 대개 그렇듯 처음에는 아파트만 빼곡한 베드타운이었지만 15~16년쯤 지나고 나니 제법 살 만한 곳이 됐다. 최근 고양시는 파리의 자전거 공공임대 시스템인 ‘벨리브’를 벤치마킹해 ‘피프틴(fifteen)’이란 제도를 도입했다. 자전거의 평균시속이 15㎞라는 데 착안해 붙인 이름이다. 방식은 파리와 비슷하다. 회원에 가입하면 30분까지는 무료로 자전거를 빌려 탈 수 있다. 임차와 반납은 시내 곳곳에 설치된 무인대여소 어디서나 할 수 있다. 전에는 영화를 보러 가거나 마트에 갈 때 버스나 승용차를 이용했지만 요즘은 자전거를 탄다. 자전거를 몰고 동네 여기저기를 운동 삼아 돌아다니기도 한다. 일산 사는 새로운 재미다.

[일러스트=강일구]

소득이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삶의 질에 관심을 갖기 마련이다. 1인당 국내총생산(GDP)의 숫자를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얼마나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느냐가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느끼게 된다. 소득의 향상이 환경이나 건강, 여가와 인간 관계의 희생 위에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그게 과연 바람직한 삶인가에 대한 의문이 일면서 성장이나 분배 같은 거대 담론보다 일상의 소소한 이슈에 관심을 돌리게 되는 것이다. 최근 총선에서 승리해 집권한 영국 보수당이 이념적 지향성을 떠나 출산·보육·교육·교통·환경 같은 생활밀착형 이슈에 천착해온 점은 시사하는 바 크다.

해서 눈여겨 보는 것이 연방정부의 지원 아래 추진되고 있는 미국의 ‘삶의 질 지표’ 개발 움직임이다. 초당파적 비영리기구(NPO)로 2007년 출범한 ‘스테이트 오브 더 유에스에이(State of the USA)’는 미 과학아카데미와 공동으로 삶의 질을 반영하는 약 300개 지표를 선정해 이를 지수화하는 작업을 벌이고 있다. 경제부터 교육·건강·주거·환경·에너지·인프라·범죄 등 인간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8개 분야를 망라하고 있다. 이 기구는 미국뿐만 아니라 각국의 실상까지 지수화해 함께 보여줌으로써 국제 비교도 할 수 있게 할 예정이다. 올여름 인터넷 사이트(www.stateoftheusa.org) 오픈을 목표로 막바지 작업이 한창이다(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 5월 15일자).

이 기구의 크리스토퍼 회닝 대표는 “미국의 다양한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삶의 질에서 미국이 뒤처진 부분을 가려내 실용적 해결책을 도모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설명한다. 누구나 인터넷을 통해 이 지표를 참고하고 활용할 수 있기 때문에 주장만 무성한 탁상공론이 아니라 실증자료에 기반한 실사구시(實事求是)적 토론이 가능해진다는 얘기다. 사람으로 치면 수백 가지 체크리스트로 구성된 종합 건강검진 기록부를 만들고, 이를 계속 업데이트함으로써 문제점에 대한 정확한 진단과 처방을 내릴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미국인의 삶의 질을 향상시킨다는 취지다.

20세기의 산물인 GDP(국내총생산)는 21세기인 지금도 여전히 ‘지표의 왕(王)’ 노릇을 하고 있다. 경제력 측정 지표로 GDP를 대체할 만한 게 아직 없는 것도 사실이다. 어떤 정치인도 “GDP는 클수록 좋다”는 ‘GDP 신화’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GDP가 정권의 성적표와 동일시되는 현실에서 성장률에 목을 매지 않을 정부는 없다. 하지만 GDP가 국가의 경제적 번영 수준을 정확하게 반영하는 데는 한계가 있는 데다 성장 중심 발전 전략에 대한 맹신을 부추길 우려가 있다는 비판은 오래전부터 있어 왔다. GDP의 맹점을 보완하면서 삶의 질을 보다 잘 반영할 수 있는 새로운 지표를 개발하려는 시도가 꾸준히 이어져 온 것도 이 때문이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셉 스티글리츠 컬럼비아대 교수와 아마티아 센 하버드대 교수는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의 의뢰로 GDP의 대안을 모색해 왔고, 선진국 모임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도 이 노력에 동참하고 있다. ‘747 공약’을 내걸었다 글로벌 경제위기로 낭패를 본 이명박 정부도 국민행복지수 개발 계획을 밝힌 바 있다. 그 대안이 무엇이 됐든 GDP 같은 범용성을 갖추지 못하면 소용이 없다. 올 11월 서울에서 열리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는 GDP를 대체 또는 보완할 새로운 지표 개발 문제를 논의하기에 적절한 장(場)이 될 것이다.

보름 후면 지방선거다. 우리 일상의 삶의 질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선거다. 총선보다 중요하다는 말이 과장만은 아니다. 8장의 투표용지가 부담스럽긴 하지만 눈을 크게 뜨고 꼼꼼히 살필 일이다. 충분히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나는 내가 사는 일산에 녹지와 꽃길을 더 만들고, 출퇴근의 고통과 불편을 덜어주고, 아이들 놀이터와 공원을 더 잘 가꾸고, 자전거길과 산책로를 더 조성하겠다는 후보에게 소속 정당을 무시하고 투표할 생각이다.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