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공격 빌미 줄라" 이라크 몸조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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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미국의 이라크 공격설이 조지 W 부시 대통령 등 미 수뇌부 쪽에서 연일 흘러나오자 이라크가 공격의 빌미를 제공하지 않기 위해 말조심을 하는 등 극도로 긴장하고 있다고 독일의 디 벨트지가 23일 보도했다. 벨트지 보도에 따르면 이라크는 아프가니스탄 공격이 시작된 이래 한 달이 넘도록 이례적으로 서방세계, 특히 미국에 대한 비난을 자제하고 있다.

후세인 대통령은 9.11 사태 이후 '세계에 대한 공개 서한'을 내고서 "전세계가 대량 유혈사태와 엄청난 비극에 직면해 있다"고 경고한 게 고작이다. 이라크에 대한 공격을 강력히 시사한 부시 대통령의 21일 발언에 대해서도 이라크는 비난을 자제한 채 "생물무기는 이미 1991년에 포기했다"는 내용의 해명성 성명을 냈다.

이에 대해 이라크의 한 고위 외교관은 벨트지와의 회견에서 "미국이 꼭 구실이 있어야 공격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미국에 공격의 구실을 제공하는 언행을 자제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마디로 조금이라도 미국에 대한 '대결 준비'로 비치는 행동을 일절 삼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라크가 철저히 통제된 사회지만 이같은 분위기는 이미 국민들 사이에도 널리 퍼져 있다. 얼마 전까지 그런대로 손님이 들던 식당이 파리를 날리고, 이라크 디나르화가 지난주 20% 평가절하되는 등 미국의 공격에 대한 공포가 확산되고 있다.

이처럼 후세인이나 이라크 국민이 미국의 공격을 두려워하는 것은 만약 이번에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한다면 10년 전 걸프전 때와는 상황이 전혀 다를 것으로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9.11 사태에 분노해 있는 미국이 대대적 군사공격을 통해 후세인의 정치적 생명은 물론 진짜 목숨까지 노리려 할 것이기 때문에 이처럼 몸을 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베를린=유재식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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