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 최승호 '해바라기에 두 팔이 있었더라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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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해가 중천에 솟아 있는데, 키가 껑충한 해바라기는 넘어져 있다. 해바라기에 짧게나마 두 팔이 있었더라면,저렇게 땅에 얼굴을 처박듯이 쓰러져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모로 누워 있는 해바라기의 얼굴, 석가도 저런 자세로 열반에 드셨다. 길 위에서의 열반, 그곳에 와서 그곳으로 가는,길 위에서의 죽음. 그러나 오로지 한자리에 서 있는 삶을 고집하던 해바라기는, 뿌리 밑에 늙은 얼굴을 파묻을 듯이, 긴 여름의 해를 등진 채 넘어져 있다.

- 최승호(1954~) '해바라기에 두 팔이 있었더라면'

"오로지 한 자리에 서 있는 삶"을 고집하다가 넘어진 해바라기를 정치적으로 생각할 일이 아니다. "짧게나마 두 팔이 있었더라면"을 읽으면서 비서실 같은 곳을 생각할 일이 아니다. 시인은 편협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훨씬 더 구체적이고 보편적이다.

시는 습관상 정치나 종교쪽으로 기울려고 하는 우리를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비극적이다. 해바라기는 해바라기이기 때문에 비극적이다. 비극적이라는 말도 안통하기에 막막하게 비극적이다. 해가 중천에 솟아있을 때도 비극적이다.

김화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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