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 허영자 '가을 달빛'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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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달빛도 이제는

해쓱하게 바래어져

사람의 발 앞을 비추질 않고

가만가만 등뒤로만 따라오누나

다소곳이 고개 숙인

반백(斑白)의 아내처럼

묻는 말에 조그맣게 대답이나 하며

한 걸음 뒤 처져서 따라오누나

-허영자(1938~),'가을 달빛'

앞서가는 사람의 호젓함이여. 눈앞에 보이는 것 모두 흐려지니 마음은 등뒤에 가 있구나. 눈을 앞에 두었으되 뒤에 따라 오는 것이 환하게 보이면 그대는 벌써 늙기 시작한다. 오오, 더러는 늙음이 말없는 정다움일 수 있고 이렇게 눈부시지 않은 밝음일 수 있구나. 잘 가라 너무나 짧았던 우리의 새된 여름이여, 외로움이 오히려 위안이니 겨울의 벼랑까지 호젓이 가리라.

김화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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