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해신 - 제1부 질풍노도 (70)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1면

일찍이 당나라 시인 두목(杜牧)은 그가 쓴 『번천문집(樊川文集)』에서 장보고와 정년(鄭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장보고와 정년은 모두 싸움을 잘 하는데 특히 말을 타고 창을 다루는데 그들의 본국에서나 서주에서 당할 자가 없었다. 특히 정년은 물재주가 좋아 숨을 쉬지 않고서도 바다 밑으로 50리를 갈 수 있었다."

두목의 기록대로 장보고 역시 바다 밑으로 50리를 갈 수 있을 만큼 잠수 능력이 뛰어났던 것이었다.

마침 썰물 때였으므로 장보고는 부하들을 거느리고 섬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조음도는 3만8천평의 작은 섬이었지만 고금도, 조약도, 신지도, 보길도, 노화도 등 큰 섬으로 감싸여 있어 내해와 같은 느낌을 주는 바다에 위치한 요충지였던 것이었다.

장보고는 섬 안으로 들어가 성큼 성큼 언덕을 오르기 시작하였다. 조음도는 울창한 삼림으로 가득차있었다. 장보고는 그 한복판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멀리 그가 다녀온 상황산의 주산이 보였고, 그 산에서 완만한 경사를 이루면서 해안선이 뻗어 내려와 있었다. 그 해안선을 마당으로 해서 1만 명의 군졸들이 함께 살아갈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넓은 터전을 이루고 있었다.

돌아보면 사방이 바다였다. 왼쪽으로는 신지도가 보였으며, 오른쪽으로는 고금도가 보였다. 신지도의 앞바다로 나아가면 그대로 중국이었으며, 고금도의 앞바다를 따라가면 그대로 일본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서있는 바로 그 자리는 바다의 꼭지점이었던 것이었다.

그 순간 장보고는 허리에 찼던 검을 뽑아 들었다. 흥덕대왕으로부터 신표로 받은 환두대도였다. 그는 부하들 앞에서 어검을 높이 세워들며 말하였다.

"그대들은 내 말을 새겨들어라. 나는 대왕마마로부터 이곳 청해진대사로 제수 받았노라. 따라서 나 청해진대사는 대왕마마의 어명을 받들어 이곳에 진영을 세우려 하노라."

허공으로 치켜세워진 환두도는 하늘에 떠있는 태양의 빛을 반사하면서 번뜩이고 있었다. 부하들은 모두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장보고의 말을 새겨 들었다.

"이곳 청해진은 년년세세 번영할 것이며, 관세음보살의 가피를 받아 영원무궁토록 창성할 것이노라."

장보고는 하늘높이 세워들었던 환두대도를 땅에 내리꽂았다. 칼은 그대로 땅위에 내리꽂혔다. 그는 주위를 돌아보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소리쳐 말하였다.

"나는 바로 이곳을 청해진의 본영으로 삼겠노라."

그리고나서 장보고는 백마의 목을 베었다. 그 피를 부하장수와 나누어 마신 후 피를 입가에 칠해 삽혈(血)하였다. 남은 피는 조음도 사방에 뿌려 천지신명께 제사지냈다.

1984년 9월. 장보고가 대왕으로부터 받은 어검을 내리꽂았던 조음도는 사적 308호로 지정받아 청해진의 본영으로 인정되었다. 이때의 보고서에 따르면 장도의 36%가량이 토석성(土石城)으로 둘러싸여져 있으며, 그 길이만 해도 760m에 이른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처럼 많은 유적에도 불구하고 섬 안에서 수많은 군사들이 살고 있었다는 역사적인 사실은 믿겨지지 않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것은 섬 안에서 우물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수많은 군사들이 상주하고 있었다면 반드시 그에 따른 수원(水源)이 있어야했던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 이 섬 안에서 우물의 유구(遺構)가 발견되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우물의 유구 중 최대 규모로 직경이 150㎝, 깊이 340㎝ 이상인 이 우물이 섬 안에서 발견됨으로써 수많은 인원이 지속적으로 살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자료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말의 목을 베어 천지신명에게 제사를 지낸 바로 그 자리에는 장보고의 넋을 기리는 사당이 세워져있다.

장보고의 본영이 세워진 그 이후부터 이 섬의 이름은 바꿔졌다. 장보고의 넋을 기려 현지 사람들은 이 섬을 조음도에서 장군섬으로 바꿔 부르고 있다. 현재 이섬은 장도(將島) 혹은 장군도(將軍島)라고 불린다.

글=최인호

그림=이우범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