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김정일은 오지 않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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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의 답방을 애타게 기다리는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호소가 헛된 노력으로 나타나고 있다. 올해의 모든 대외정책이 김정일 위원장의 방한에 맞춰져 있다고 할 만큼 한국은 다른 외교문제에는 무신경을 드러내고 있다.

*** 北美관계 개선 기로에 서

지난해 金대통령과의 정상회담 이후 金위원장이 6.15 공동선언에 명시한 대로 "적절한 시기"가 아니기 때문에 아직까지 답방하지 않았다고 해도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는 올 것인가□

지난 9월 북한은 통일부 임동원 장관의 해임안 통과 직전에 갑작스럽게 남북회담 제의를 했고, 이에 한국은 신임 홍순영 장관을 대표로 남북 장관급회담에 임했다.

그러나 이때 합의를 한 이산가족 재회는 아무런 이유없이 연기됐고 부분적으로 금강산 관광대금 지불만이 이뤄졌을 뿐이다. 북한의 요구에 따라 이번 주에 금강산에서 열릴 장관급회담은 금강산 관광대금의 완불을 원하는 북한의 입장이 반영되고 있다.

미국의 조지 W 부시 행정부 등장 이후 올해 초 한.미 정상회담이 열리고 남북한 관계가 냉각됐으나 북한은 나름대로 북.미관계 개선을 위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

북한은 이탈리아.스웨덴 총리를 초치하고 유럽연합(EU)과의 협력관계를 바탕으로 대미관계 개선을 위해 우회적인 방법으로 접근해 왔다.부시 대통령이 북한과의 전제조건 없는 대화를 내세워 3개 의제를 제의해오자(6월 6일) 북한은 金위원장의 중국.러시아 방문과 장쩌민(江澤民)주석의 방북을 통해 대미협상력 강화를 위한 신동맹 삼각관계를 모색하기도 했다.

그러나 뉴욕의 세계무역센터에 대한 테러사건으로 북.미관계 개선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면서 북한은 중대한 결정의 기로에 서게 됐다. 미국과 협력할 것인가,아니면 테러국으로 남아 보복을 당할 것인가를 선택해야 한다.

북한은 테러에 반대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테러반대협약을 체결하겠다는 의지를 밝히고 있다. 그러나 미국은 이에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북한이 아프가니스탄에 있는 테러캠프나 다른 테러활동과 전혀 무관하다고 주장하기에는 지난날들의 행적을 감추기가 쉽지 않다. 이미 미국이 북한의 테러 관련 정보를 파악하고 북한을 압박할 수 있는 수단을 확보하고 있다면 오히려 북한은 더욱 어려운 처지에 빠질 수 있다.

더구나 오사마 빈 라덴을 보호하고 있는 아프가니스탄과 테러와의 전쟁을 수행 중인 미국이 북한과 이른 시일 안에 관계개선을 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이와 같이 북.미관계 개선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남북한관계도 답보상태에 있다. 현재 한국 정치권의 분열상이나 경제사정으로는 金위원장의 거국적인 환영분위기를 기대할 수 없으며 북한은 생존의 마지막 카드라고 할 수 있는 답방문제를 함부로 다룰 수 없을 것이다.

햇볕정책을 통해 북한이 개혁.개방정책을 추진해 경제발전을 이룩하고, 이를 바탕으로 평화공존의 발판을 마련하고자 하는 金대통령의 노력을 과소평가할 필요는 없다. 분단 이후 적대적 관계에 있던 북한에 金대통령은 가장 호의적인 대화상대임에 틀림없다.

*** 성과없이 답방카드 쓸까

미국의 빌 클린턴에 이은 부시 대통령과의 대화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절감하고 있는 경험에 비춰볼 때, 金위원장에게는 金대통령에 이은 다음 정권과의 대화가 더욱 힘들어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金위원장은 별다른 성과도 없이 답방카드를 써버린다면 오히려 다음을 기약할 수 없게 될 것이라는 계산을 할 수 있다.

金위원장이 답방하지 않더라도 장관급회담 등을 통해 북한이 실리를 취할 수 있다고 간주한다면 굳이 이 시점을 "적절한 시기"로 선택할 필요가 없다.

金대통령을 상대로 金위원장이 한국에 올 이유는 없다. 앞으로 金대통령은 본인이 아니면 남북한관계가 나빠질 것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지금까지의 대북한 추진 업무를 마무리하고 다음 정권에 임무를 넘겨야 한다. 그래도 金위원장은 남북한관계를 포기하지 않는다.

安仁海(고려대 국제대학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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