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루몽 주인공 너무 미화 … 후계자 김정은 자꾸 연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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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주인공 김일황

8일 밤 베이징TV 대극원에서 열린 북한 피바다가극단의 가무극 ‘홍루몽(紅樓夢)’ 공연에는 김정일 정권의 권력 세습을 정당화하는 복선이 곳곳에 깔려 있었다.

이날 공연에서는 중국의 정·관계, 문화계 인사들 및 조선족 동포, 한국 교민 등이 1000여 개의 객석을 가득 메웠다. 공연장 관계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중국 지도자들의 관람이 6일 오후에 갑자기 취소되는 바람에 리창춘(李長春) 정치국 상무위원(서열 5위)이 7일에 별도로 관람했다”고 확인했다.

청나라 조설근의 장편소설 홍루몽은 남자 주인공 가보옥(賈寶玉)과 두 여주인공 임대옥(林黛玉)·설보채(薛寶釵) 간의 3각관계로 인해 빚어지는 비극과 봉건 가문의 흥망을 그린 대작이다.

1961년 중국에서 가극 홍루몽을 본 김일성이 귀국한 뒤 제작을 지시해 처음 북한판 홍루몽이 만들어졌다. 이후 2008년 북·중 친선의 해를 맞아 김 위원장이 또다시 제작을 지시했으며, 이를 지난해 10월 북한을 방문한 원자바오(溫家寶) 중국총리가 관람했었다.

북한 피바다 가극단원들이 6일 중국 베이징 베이징TV 대극원에서 가무극 ‘홍루몽(紅樓夢)’ 공연을 하고있다. 중국 청나라 때 고전소설을 북한이 각색해 만든 이 공연은 북·중 친선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문화 행사로 꼽힌다. 지난 5, 6일 김 위원장이 베이징을 방문했을 때 함께 관람할 것으로 예상됐지만 관람을 취소하고 그냥 북한으로 돌아갔다. [베이징 신화통신=연합뉴스]

북한판 홍루몽은 원작의 배경인 베이징 대관원(大觀園)과 중국식 의상을 극중에 그대로 채택했다. 공연 관계자는 “다만 북한이 홍루몽을 가무극으로 만들면서 모든 음악을 새로 창작했다”고 전했다. 특히 작품의 후반부에는 귀에 익은 전통 민요 가락을 변화시킨 음악이 흘러나왔다.

소설 홍루몽의 스토리를 기반으로 했지만 몇 가지 튀는 점이 눈에 띄었다. 우선 극중 도련님으로 불린 남자 주인공에 대한 지나친 찬사가 원작의 의도에서 벗어나는 듯했다. 공연을 본 한 교민은 “남자 주인공을 과도하게 미화한 대목을 보면서 김 위원장의 후계자로 내정된 3남 정은이 자꾸 연상됐다”고 밝혔다. 홍루몽 원작에도 유사한 대목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남자 주인공을 ‘돈과 명예에 무관심한 정의로운 인물’로 그려내려는 의도가 엿보였다.

중국대외우호협회 관계자도 “원래 홍루몽의 남녀 주인공은 10대 중반인데 북한 작품에는 20대 중반으로 설정돼 이상했다”고 지적했다. 82년생(실제는 83년생)인 정은의 나이 또래에 의도적으로 맞췄을 수 있다는 얘기다. 리허설 기간 중 남자 주인공 김일황이 중국중앙방송(CC-TV)과의 인터뷰에서 한 말도 예사롭지 않았다. 그는 “할아버지가 홍루몽의 남자 주인공 역을 맡았었는데 손자인 내가 대를 이어 주인공을 맡게 돼 가문의 영광”이라고 자랑했다.

그는 공연 후 사진촬영에는 응했지만 규정이라며 흰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말없이 공연장을 떠났다. 북한 스태프는 “오늘 공연이 최고로 좋았다”며 만족해 했다. 배경음악을 연주한 한 오케스트라 단원은 “이번 공연을 위해 2~3개월 연습했다”면서도 “힘들지는 않다”고 말했다. 공연장에서 만난 중국인은 “‘꽃 파는 처녀’에 이은 대작을 봤다”며 “중국의 대표적 고전작품인 홍루몽을 가무극으로 만들어 낸 나라는 북한뿐”이라고 호평했다. 그러나 또 다른 일반 관람객은 “중국의 홍루몽을 어렵게 재창작한 것처럼 북한이 중국의 개혁·개방 경험도 배웠으면 좋겠다”고 꼬집었다.

베이징=장세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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