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병, 생각보다 깊고 오래갈 듯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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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호 26면

최근 금융당국의 고위관계자와 장시간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과문한 탓인지 깜짝 놀랄 만한 내용이 있었는데 요지는 이랬다. “국제회의에 참석하러 유럽에 갔더니 유럽 은행들은 미국이나 우리나라와 회계 처리 방식이 많이 달랐다. 아직도 시장가격이 아닌 장부가로 자산을 평가하고 있었다. 아마도 부실을 덮기 위해서로 보였다.”

주정완의 시장 읽기

1998~99년 우리의 모습이 떠올랐다. 외환위기로 부실이 속출했지만 국내 금융회사의 장부는 겉보기엔 멀쩡했다. 비밀은 바로 ‘장부가 평가’였다. 부실이 생겨도 바로 장부에 올리지 않고 일단 만기까지 그대로 가져가는 방식이었다. 당시 펀드(수익증권)에 투자했던 사람들은 ‘대우채 사태’라는 기억이 떠오를지 모르겠다. 장부가로 평가하던 금융회사(주로 투자신탁회사)들이 뒤늦게 대우채권의 부실을 고객에게 떠넘기면서 큰 혼란이 생겼다.

아시아 외환위기 당시 우리와 비슷한 일이 현재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다. 이미 그리스는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했고, 포르투갈과 스페인 등으로 위기가 번질 조짐이 보인다. 세계 6위의 경제대국인 영국도 안심할 수 없다고 한다.

유럽의 위기는 전 세계 금융시장을 강타했다. 미국 뉴욕 증시의 다우지수는 한때 1만 선이 무너졌다. 국내 증시에서도 외국인들의 동향이 심상치 않다. 외국인들은 6일과 7일 이틀간 2조원어치의 주식을 내다팔았다. 리먼브러더스 사태가 발생했던 2008년 9월을 뛰어넘는 사상 최대 규모의 ‘팔자’다.

위기가 닥치면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투명성이다. 그래야 사람으로 치면 수술할 사람은 수술하고, 약으로 치료할 사람은 투약 처방을 내릴 수 있다. 투명하지 않으면 정확한 처방이 불가능하다. 당장은 수술대에 오르는 괴로움을 피할 수 있을지 몰라도 병의 뿌리를 치유할 수 없다. 우리보다 선진화됐다고 믿었던 유럽의 은행들이 투명하지 못하다면 그 병은 생각보다 깊고 오래갈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국내 증시의 한 가닥 희망이라면 풍부한 유동성이다. 최근 삼성생명 공모주 청약에는 20조원이나 몰렸다. 이 중 주식을 사고 남은 19조원이 7일 투자자들의 계좌로 환불됐다. 이 돈이 증시로 많이 와 준다면 사정은 좀 나을 것이다. 그러나 큰 기대는 어렵다. 증시가 지금처럼 불안하다면 상당부분이 되레 길을 잃고 떠도는 ‘단기 부동자금’으로 머물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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