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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과 노무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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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노무현 대통령의 대미외교는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대미외교와 적잖게 대비된다. 이승만은 외교의 프로였고, 노 대통령은 외교의 아마추어다. 따라서 두 개인을 직접 비교함은 무리다. 그러나 '미국에 대해 할 말을 한다'는 점에서 둘은 일치한다.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생존과 안보를 담보하는 생명선으로 미국과의 군사동맹 체결에 매달렸다. 노 대통령은 삐걱거리는 50년 군사동맹의 재정비와 씨름 중이다.

열흘 전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국대사는 "한.미관계는 낡은 목조 전투선과 같아 아직 떠 있기는 하지만 빨리 손질하지 않으면 가라앉을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한.미동맹의 위기는 곧 대한민국의 위기다. 둘이 처한 위기적 상황이 그렇고, '벼랑 전술'을 마다하지 않는 것도 닮았다.

이승만은 미국에 주장할 것은 당당히 주장하고 따질 것은 철저히 따져 국가의 위상을 지켜낸 인물로 평가받는다. 미국 대통령이나 국무장관에게 직격탄을 날리고 서울의 미국 당국자들을 깔보고 호통쳐 갖은 욕을 먹기도 했다. 워싱턴 방문 때는 공항에서 즉흥연설로 미 행정부를 비판하고 의회 의원들과 미국 국민에게 직소 또한 서슴지 않았다.

이런 '돌출행동'들은 워싱턴 정치와 외교의 속성을 누구보다 잘 안다는 자신감, 그리고 한국의 생존과 안보는 좋든 싫든 미국의 의지와 정책에 달려 있다는 냉엄한 현실인식에서 비롯됐다. 그는 닉슨 부통령에게 "미국이 이승만을 마음대로 조종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순간 당신들은 가장 효과적인 협상수단을 잃게 된다"며 "한국의 단독행동에 관한 나의 말들은 모두 미국을 도와주기 위한 것"이라고 털어놓았었다.

노 대통령의 일련의 돌출발언들은 우선 맥을 잡기가 힘들다. 후보 시절 미국에 맞서는 듯하다 첫 방미 때 '수용소 발언'으로 친미 행보로 돌아섰고, 이라크 파병 결단으로 한.미공조에 매달리는 듯하다 'LA 북핵 발언'으로 대미 강경으로 다시 돌아섰다. 북.미 간 중재역 운운하다 6자회담 틀 안에서의 건설적 역할, 그리고 이번에는 북한을 두둔하며 독자역할을 들고 나왔다. 어느 쪽이 진심인지 계속 헷갈린다.

미국에 대해 할 말을 한다면 탄탄한 밑그림을 갖고 당당하고 일관성 있게 해야 한다. LA 북핵 발언은 국내에서만 법석을 떨었을 뿐 미국 언론에는 거의 보도도 안 되었다. '토론이 필요하다'는 국무부의 완곡한 반응도 한국 언론이 물어서 얻어낸 답변이다.

정상회담 후 부시 대통령이 5개국의 '단합된 목소리'로 북한에 핵을 폐기하라고 분명한 메시지를 보낸 것을 보면 우리의 독자적 역할의 여지는 있어 보이지 않는다. 부시와의 회담 때 "북한과의 대화에서 보다 많은 유연성을 요구한 지도자는 아무도 없었다"는, 익명을 요구한 미국 당국자의 전언이 더욱 그렇다. 북핵문제에 대한 한국의 민감성을 미국이 이해한다는 표현을 한국의 주도적 역할 용인으로 해석한다면 이는 비약이다.

앞문을 닫아 걸 때 뒷문은 슬며시 열어두는 것이 외교의 기본이다. 한국이 북한을 내놓고 두둔할 경우 주도적 역할의 입지는 그만큼 좁아진다. 북한 측 호응도 변수며 자칫 6자협의에서 한국이 배제되거나 '왕따'당할 위험도 다분하다.

이승만만큼 미국에 대한 배신감으로 치를 떨었던 통치자도 드물다. 그러나 지도자는 국가의 안위와 중대한 국익이 걸렸을 때는 바짓가랑이보다 더한 것도 잡을 수 있어야 한다. 50년 전 용미(用美)전략가 이승만의 통찰력과 혜안이 새삼 그립다.

변상근 월간NEXT 편집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