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 넘은 결혼… "라볶이 같은거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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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요즘 피부색이 다른 국제결혼 커플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국경을 초월한 만남' 이 많아진 영향이다.한국인과 결혼해 현재 국내에 살고 있는 외국인은 85개국 출신 2만여명.남다른 사연을 가진 이들은 어떤 재미와 어려움이 있을까.

서울에 사는 국제결혼 커플 두쌍에게 이야기를 들어보자.

*** 백원기씨 '내 아내는 일본인'

제 아내의 이름은 미오시 지카코(三好千賀子.25.회사원.서울 동대문구 이문동). 일본 사람입니다.

"한국 여자를 두고 왜 일본인하고 결혼했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습니다. 제 대답은 간단합니다. 지카코는 이 세상에 단 한명이니까요.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5년 전.우리는 중국 선양(瀋陽)에서 유학 중이었습니다. 끙끙거리며 시장 바구니를 들고 가던 그녀를 자전거에 태우면서 사랑이 싹텄죠. 그리고 지난 1월 한국에서 결혼식을 올리기까지 부모님의 반대는 거셌습니다. 외동 아들이라서 더욱 그랬죠. 친척들도 "제사지낼 때 조상님 뵐 면목이 없다"며 한결같이 말렸습니다.

지금은 어떠냐고요? 결혼한지 1년도 안됐는데 아내는 시부모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답니다. 어설픈 한국말 때문에 생긴 해프닝이 오히려 온 집안에 웃음꽃을 가득 선사하곤 하지요. 한번은 "배 아파"대신 "폐 아파"라고 해 약국 대신 큰 병원으로 달려간 적도 있다니까요.

문화적인 차이요? 물론 크죠.그래서 국제결혼은 '어려움도 두배,재미도 두배'입니다. 특히 한.일 커플은 양국의 역사문제 등에 민감하죠.우린 터놓고 얘기를 나눕니다.

아내는 "우익에서 아무리 발버둥쳐도 역사 왜곡 교과서는 일본에서 외면 당할 것"이라며 핏대를 세웁니다.오히려 제가 할 말을 잃고 맙니다.

그래도 TV에서 한.일전 축구라도 하면 어림없죠. 서로 자기 나라를 응원합니다. 치킨 내기니까 한치 양보도 없어요. 국제결혼을 한마디로 표현하라고요□ 특별하진 않아요. 세상엔 다양한 방식의 삶이 있죠. 그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 미오시 지카코씨 '한국으로 시집오니…'

제 이름은 지카코. 한국인 남편(白元基.30.사업)과 결혼한지 1년이 안된 새댁입니다. 지금은 한국말도 조금 늘어 한국 관광정보를 인터넷으로 일본에 알려주는 여행사(http://www.seoulnavi.com)에서 근무하고 있어요.

결혼생활이요? 정말 하루하루가 '핫켄노 렌소쿠(발견의 연속)'입니다. 문화가 다르니까 얘깃거리가 마구 샘솟죠. 문화적 차이는 제 생활의 비타민입니다.

물론 힘들 때도 있어요. 지난 추석 때는 부산 시댁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시부모님께서 "너는 이제 손님이 아니라 우리 가족"이라고 하셨어요.

너무 기뻤죠. 그리고선 명절 음식 준비가 시작됐는데 하루 종일 일을 했어요. 속으로 '시부모님이 나를 싫어하시나보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그게 한국의 명절 문화임을 알았어요.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친해져야 일을 시키는 일본과 달랐습니다.

가끔은 주변 시선이 부담스럽기도 해요. 집 앞 골목을 지날 때면 동네 할머니들이 "일본 색시냐□"며 일제시대 이야기를 저에게 하세요. 그럼 전 또 시무룩해지죠.

하지만 신나는 일이 더 많아요.한번은 가게에서 야채 이름을 잊어버려 우물쭈물하고 있는데 주인 아주머니가 "외국 사람이냐□"며 웃더니 콩나물을 한웅큼 더 얹어주는 거예요. 한국 사람의 그런 정겨움이 참 좋아요.국제결혼이요? 음…, 매일 매일 계속되는 새로움이죠.

*** 크리스토퍼 로렌스씨 '백년손님 돼보니'

방금 아내(辛鍾淑.주부)가 소개한 크리스입니다.

한국인과의 결혼 생활은 여러모로 인상적입니다. 요즘은 '사위 사랑은 장모'란 말의 의미를 실감합니다. 처가가 있는 부산에 내려가면 장모님은 온갖 생선을 사다가 구워 주시죠. 제가 '백년 손님'이래요. 서양에선 장모와 사위 관계가 이렇게까지 정겹진 않거든요.

또 아내는 항상 기대보다 더 많이 절 존중해주죠. 서양의 부부관계는 꽤 경쟁적(competitive)입니다. 내 돈과 상대방 돈을 분명하게 가르기도 합니다.

한국에선 모든 게 '우리 것'이죠. 한국의 부부관계는 대단히 공동체적입니다. 그래서 인간미가 물씬 풍기죠. 반면 서양의 부부관계는 합리적이면서도 매정한 느낌이 느껴지는 게 사실입니다.

간혹 문화적 차이로 인한 오해로 부부싸움도 생기죠. 예를 들어 호주에선 남자들이 여자를 위해 문을 열어주거나, 앉을 때 의자를 밀어주는 일은 매우 자연스런 일입니다. 굳이 연인 사이가 아니라도 말이죠. 그런데 한국에선 이런 행동이 오해를 빚더군요.

아내는 "한국에선 호감이 있는 사람에게만 그렇게 한다"고 설명하더라고요. 이런 사소한 다툼은 결국 서로를 이해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합니다.

국제결혼이요? '라볶이'같은 것이죠. 서로 다른 재료가 만나서 제3의 맛을 내니까요.

*** 주부 신종숙씨 '호주에서 온 남편'

제 남편의 이름은 크리스토퍼 로렌스(36.주한 영국문화원 직원.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그냥 '크리스'라고 부르죠.

호주 사람인 그를 처음 만난 건 7년 전.제가 주한 파푸아 뉴기니 대사관에서 일하고 있을 때였죠. 그는 여행 중인 대학생이었어요. 친구에서 연인으로, 그리고 1년 후 결혼했죠.

언니가 미국 사람과 결혼하면서 한바탕 '전쟁'을 치른 덕에 부모님의 반대는 그다지 심하지 않았어요. 좋은 점이요? 무엇보다 서로의 생활을 공유한다는 점이죠.

낮에 회사에서 있었던 일을 함께 얘기하고, 사소한 조언들을 서로 주고 받죠. 또 외부 모임은 항상 부부동반입니다. 초청장 봉투엔 언제나 '로렌스 부부 앞'이라고 적혀 있어요. 제가 못가면 남편도 못가는 것으로 생각할 정도니까요.

이른바 회식 등 '남자들만의 세계'때문에 제가 소외당하는 일은 없어요.

또 하나 들자면 가사 분담에 대한 생각이죠.'아내를 도와준다'는 게 아니라 너무나 자연스럽게 '우리 일'로 여깁니다.

물론 아쉬운 점도 있어요. 제가 '봄날은 간다'란 노래를 부르면 남편은 박수를 치며 "베리 굿!"이라고 해요.

하지만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란 가사에 담긴 알싸한 정서까지 나누긴 힘들죠.아마도 이게 국제결혼의 한계가 아닐까 싶어요.

또 호기심어린 거리의 시선들은 종종 저를 불편하게 해요. 서양 남자와 손잡고 가는 한국 여자가 무척이나 궁금한가봐요. 그래도 갈수록 국제 커플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변하고 있음을 느껴요.7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다니까요.

국제결혼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글쎄요,'문명의 하모니'쯤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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