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내 생각은…

헌재도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3면

신행정수도특별법에 대한 헌법재판소(헌재)의 위헌 결정이 내려진 지 한달여가 지난 시점에도 그 결정에 대한 공방이 뜨겁다. 논쟁의 과정에서 주목할 것은 주요 신문들의 사설과 시론이 헌재 결정에 대한 비판을 헌정질서를 문란하게 하는 행위로 간주하는 논조를 지속적으로 싣고 있는 점이다. 현대입헌민주주의가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다 실질적으로 보장하기 위해 민주주의의 원리에 바탕해 형성된 입법권과 행정권의 결정에 대해 사법적 절차를 통해 법치주의에 바탕한 통제를 발전시킨 것은 인류사의 중요한 진보에 해당하는 것이 사실이므로 이런 논조들의 기본 취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바가 아니다.

그러나 매사에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는 것은 이런 경향에도 적용된다. 대표적으로 한 중견 헌법학자는 이 신문 15일자 시론에서 헌법국가의 최종적 이성은 헌재재판관이라고 전제하고 그들의 이성이 옳기 때문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판단했기 때문에 이를 이성적인 것으로 보아 복종해야 한다고 단언한다. 나아가 이번 헌재 결정에 대한 비판을 민주적 결정인 법을 한 사람이나 무정형으로 결집된 대중의 말로 폄하한 것으로 보고 헌정의 위기로 몰며 헌재 재판관의 판단이 헌법을 구현하는 정법임을 주장한다.

그러나 보다 정확한 우리 헌법의 정신은 헌법재판소의 이성을 통해 과도한 정치권력의 전횡을 잠정적으로 통제해 공동체의 안정적인 발전을 추구하는 것이지 헌재 권력을 절대적이고 영원한 것으로 성역화(聖域化)하는 것이 아니다. 헌재 권력도 헌법에 의해 창설된 권력으로서 스스로 헌법 자체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 따라서 헌법이 부여하지 않은 권한을 헌재가 주어진 권한을 변용해 스스로 참칭해서는 안 된다. 이번 헌재 결정은 성문헌법을 전제로 인정된 위헌심사권을 불문의 관습헌법에 근거해 행사함으로써 교묘한 형식논리로 헌법제정권을 스스로 형성한 것이라는 비판을 받을 여지가 충분하다.

또한 헌재 권력도 주권자인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이며 국민의 민주적 통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국민의 민주적 통제는 헌재 결정 자체에 대한 번복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헌재 결정에서 헌법의 정신을 제대로 구현하고 있는지에 대한 정치적.사회적.학문적 비판으로 이뤄진다. 많은 사람이 헌재 결정의 최종성을 들어 헌재 결정에 대한 비판을 문제삼지만 헌재 결정의 최종성은 구체적으로 제기된 특정사건에 관한 재판절차적 종결을 의미해 그 사건에 관련해 최종적 효력을 가질 뿐이다.

결국 헌재 결정의 최종성은 이번 사건의 경우 신행정수도특별법이 위헌이어서 효력을 상실한 결과를 번복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며 그 결정을 뒷받침하는 모든 논증의 절대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번 결정으로 세계 헌정사에 유례없이 인정된 관습헌법에 바탕한 위헌심사제도가 헌법적으로 정당한지에 대한 논의는 이제 국민의 민주적 통제에 맡겨진 것이다. 헌재의 위헌심사권이 이번 사건과 같이 국가중점사업에 대한 정치적 결정의 효력을 무효로 할 수 있을 정도로 막강한 권력이므로 그 권력의 행사가 헌법에 부합돼 행사됐는지에 대한 검증은 우리 입헌민주체제의 안정적이고 건전한 발전을 위해 필수적인 과정이기 때문이다.

일찍이 위헌심사권을 발전시킨 미국 연방대법원의 경우도 숱한 잘못된 결정들에 대해 치열한 사후적 검증과정을 거쳐 시정함으로써 오늘날과 같은 사법왕국을 구축해낸 역사가 있다. 대표적으로 흑인노예는 재산일 뿐 인간이 아니라는 1857년의 드레드 스콧 결정은 골육상쟁의 남북전쟁을 겪은 후에야 시정됐고 흑인과 백인을 공공시설에서 분리수용하는 것을 합헌으로 결정한 1896년의 퍼거슨 결정도 숱한 시행착오 끝에 "미국 헌법은 색맹"이라는 정신에 따라 교정됐다.

헌법에 의한 지배를 지향하는 입헌주의에 의할 때 헌법재판권력도 국가권력으로 정치권력에 비해 덜 위험하다는 상대적 차이 외에는 권력 남용의 가능성에 있어 예외일 수 없다. 민주주의를 내세워 법을 정치의 시녀로 전락시키는 것도 경계해야 하지만 법치주의를 교조적으로 이해해 민주적 책임성이 약한 소수 판관들의 결정을 성역화하는 사법독재적 발상도 자유민주국가에서 용납될 수 없다. 무엇이 우리 헌법의 정신인지에 대한 균형잡힌 이해가 절실히 요청되는 시점이다.

김종철 연세대 조교수·헌법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