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삼성생명’에서 확인된 시중의 막대한 부동자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0면

삼성생명 공모주 청약에 사상 최대인 19조8000억원이 몰렸다. 그만큼 시중에 떠도는 돈이 많다는 방증이다. 부동 자금은 물꼬가 트이면 갑자기 한쪽으로 쏠리는 경향이 있다. 삼성생명 상장이란 ‘소문난 잔치’에 이런 돈이 한꺼번에 몰린 것이다. 시중 자금의 부동화(浮動化) 현상은 통계로도 확인된다. 머니마켓펀드(MMF)와 종합자산관리계좌(CMA)를 포함한 6개월 미만의 단기투자상품에 614조원이 집중돼 있다. 예금과 부동산·채권에서 수익을 내기 어려워지자 언제든지 현금화할 수 있는 이런 상품들에 돈이 몰리는 것이다.

거꾸로 돈의 유통속도는 뚝 떨어졌다. 은행은 대출할 곳이 마땅치 않고, 기업과 가계는 설비투자나 소비보다 돈을 묶어두고 있다. 부동 자금의 눈치 보기가 심해지면서 통화승수는 11개월 만에 최저치로 내려앉았다. 자금의 부동화 현상은 당분간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코스피지수는 1700선을 넘었고, 부동산 시장도 쉬어가는 조짐이 뚜렷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한 사회적 비용도 만만찮다. 한국은행은 지난 3월 10조원에 육박하는 통화안정증권을 발행했다. 콜금리가 기준금리(2%)보다 낮아지는 것을 막기 위해 이자까지 물면서 통화안정증권을 팔아도 과잉 유동성을 조이는 데는 한계가 뚜렷하다.

돈이 자꾸 단기금융상품에만 몰리면 통화정책 효과는 기대하기 어렵다. 이른바 ‘유동성 함정’에 빠지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부동 자금이 한꺼번에 부동산이나 증시로 쏠리면 갑자기 가격이 비합리적으로 치솟을 수 있다는 점이다. 인플레이션과 자산 거품이 생기는 것이다. 경제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통화·재정정책이 또 다른 경제위기를 부른다면 정말 어리석은 행위다. 해외 언론들은 “한국이 뒤늦게 물가를 잡으려다 경제에 타격을 줄 우려가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최근 방한한 스티븐 로치 모건스탠리 아시아 회장도 “중앙은행들이 출구전략 시기를 놓치면 감당하기 어려운 사태가 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당국은 부동 자금을 생산적 분야로 돌릴 수 있는 정책 대안을 세워 화(禍)를 미연에 막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