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詩)가 있는 아침 ] - '빈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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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박형준(1966~ ), 「빈집」전문

개 한 마리
감나무에 묶여
하늘 본다
까치밥 몇 개가 남아 있다
새가 쪼아 먹은 감은 신발
바람이 신어보고
달빛이 신어보고
소리없이 내려와
불빛 없는 집
등불

겨울밤을
감나무에 묶여
앞발로 땅을 파며 김칫독처럼
운다, 울어서
등을 말고 웅크리고 있는 개는
불씨
감나무 가지에 남은 몇 개의 이파리
흔들리며 흔들리며
새처럼 개의 눈에 아른거린다

주인이 놓고 간
신발들
빈집을 녹인다
긴 겨울밤.


겨울밤, 빈집, 잎과 열매를 놓아버린 나무, 까치밥으로 남은 감 몇 개, 개 한 마리. 다 비워져 쓸쓸한 공간이 되어서야 시에 마음껏 놀 수 있는 상상력의 공간이 생긴다. 까치가 쪼아 텅 빈 감 속으로 바람과 달빛이 와서 논다. 빈 감은 달빛으로 채워져 주홍빛 등불이 되고 그 등불은 불빛 없는 빈집을 녹이고 밝힌다. 비울대로 비웠는데도 시는 놀이의 힘으로 스스로 채워지고 따뜻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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